오피니언 시론

상고법원 신설이 가장 현실적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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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황정근
변호사·전 대법원 재판연구관

사법개혁 과제 중 가장 시급한 현안은 바로 상고심 제도 개혁이다. 올 8월 말로 시행 20년을 맞이하는 현재의 ‘심리불속행(審理不續行) 제도’(상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사건은 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 그렇다고 1981년부터 90년까지 시행했으나 실패한 ‘상고허가제’를 다시 도입할 수는 없다. 고등법원에 상고심사부를 두는 방안도 더 이상 추진하기 어렵게 됐다. 전국 모든 고등법원에 두어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아 있는 방안은 세 가지 정도다. ▶대법원과 별도로 상고법원을 신설하는 방안 ▶대법원에 대법관 아닌 대법원판사를 두는 이원화 방안 ▶대법관을 늘리는 방안 등이다.

 대법관은 현재 대법원장·법원행정처장을 포함해 총 14명이다. 대법관을 증원해 문제를 해결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몇 명을 늘려야 할지부터 가늠하기 어렵다. 몇 명 증원해서는 그 효과도 미미하다. 제18대 국회에서 사법제도개혁특위가 가동되었다. 그 과정에서 ‘법원소위’는 20명으로 증원하자고 제시했다. 당시 대한변호사협회는 50명으로 대폭 늘리자는 의견을 냈었다. 증원은 언뜻 보면 손쉬운 해결책으로 보이지만 최고법원의 본질에 어긋나 제도 개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라 규모가 커지고 국사(國事)가 늘어났다고 해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의 수를 무작정 늘릴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헌법상 대법원은 ‘최고법원’이다. 법령의 통일적 해석을 통해 사회의 법적 가치기준과 경제생활의 가이드라인을 최종적으로 정립하는 곳이다. 최고법원은 법과 원칙을 바로 세움으로써 사회갈등 해소와 사회통합에 앞장서야 한다.

 대법관 증원 안은 정책법원을 지향하는 최고법원의 위상에 반한다. ‘최고법원성(性)’의 핵심은 대법관 전원으로 이루어진 전원합의체다. 국가와 사회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가치기준과 지향점은 전원합의체에서 대법관 전원이 함께 토론해 결정해야 한다. 최근 대법원은 ▶종교단체가 설립한 사립학교 종교 교육의 한계나 ▶상여금과 통상임금의 범위를 전원합의체에서 열띤 토론을 통해 결정함으로써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불확실성을 제거했다.

 이러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원합의체는 13명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대법관을 20명 내지 50명으로 증원하면 제대로 된 전원합의체가 운영될 수 없다. 그중 일부로 전원합의체를 여러 개 구성한다는 것은 최고법원성에 반한다. 증원안은 전원합의체를 포기하고 대법관 3~4명으로 이루어진 소부(小部) 중심으로 상고심을 운영하자는 것과 다름없다.

 증원안은 실제로 여러 제도를 시행해와 상고심 운영의 노하우를 가진 사법부가 반대하고 있다. 대법원의 지지를 받기 어려워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도 낮다. 대법관은 국회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런데 대법관 수가 증가하면 국회가 대법관 임명을 위한 인사청문회와 동의절차를 수시로 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이 시점에서 여러 문제점이 있는 대법관 증원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책(下策)이다. 연 3만 건이 넘을 정도의 상고사건 폭증으로 대법원이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의미 없는 논쟁에 국가적·사회적 역량을 소모할 여유가 없다. 지금은 법령해석의 통일을 위한 대법원의 충실한 역할 수행과 개별 사건에서의 권리 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제도를 고안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때다.

 국민이 대법원에 요구하는 것은 사실 상호 모순된다. 국가의 명운을 가르는 중요 사건을 신중하게 심판하는 정책법원으로 기능하면서도, 개개의 상고 사건에서 국민의 권리 구제에도 충실한 상고심을 원하고 있다. 정책법원과 권리구제법원을 함께 원하는 이러한 이중적·다원적인 국민의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묘책을 찾아내야 한다.

 여러 사정을 다 감안할 때 현실적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다. 오랜 검토 끝에 지난달 17일 대법원 사법정책자문위원회가 제시한 방안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 사건은 대법원이 맡고, 그 밖의 일반 사건은 별도의 상고심 법원이 담당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내지 법원장 급으로 구성된 상고법원을 별도로 두는 방안 외에, 상고법원을 별도로 두지 않고 헌법 제102조 제2항 단서에 따라 대법원에 대법관 외에 상당한 경력의 ‘대법원판사’를 두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무릇 제도라는 것은 어떤 식이든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지선극미(至善極美)한 것은 없다. 제도는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적 여건 사이에서 차선책을 국민의 입장에서 선택해야 하는 문제다. 절충하고 타협해 실현 가능한 합리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 상고심 제도도 마찬가지다.

황정근 변호사·전 대법원 재판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