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681>|제66화 화교 (56)|??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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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유국화씨가 한국으로 온 것은 6·25전해인 49년3월이었다.
이때 중국본토와 만주는 모택동의 중공군이 거의 석권하고 있었다. 유씨는 이들에게 반동분자로 몰리게 됐다. 중앙군(국부군)산하 장교였는데다 45년 한국인 9백여명을 구해준 일로 못마땅하게 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할수없이 한국으로 피신해야 했다.
평안도를 거쳐 육로로 서울에 도착했으나 살길이 막연했다. 중국대사관을 찾는 수 밖에 없었다. 대사관에선 마침 화교학교 교원모집을 하고 있었다.
유씨는 시험에 응시해 무난히 합격됐다.
합격은 됐지만 보증인이 문제였다. 대부분이 산동인인 화교사회에 만주인인 유씨의 연고자나 친지가 있을리 없었다. 애를 먹던 유씨는 문득 만군출신 장교들이 한국군요직에 많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곧 국방부로 찾아갔다.
국방부 정문앞에서 무작정 아는 얼굴을 기다렸다. 운이 좋아서였는지 곧 동덕대 동창 한사람을 만났다. 당시 해군소령이던 강태민씨(전사)였다. 반가와하는 강씨로부터 예관수·장은산씨등 동기생들의 소식도 알게 됐다.
이들의 보증으로 유씨는 곧 대전 화교소학교 교감직에 발령받았다.
1년후 대전에서 6·25를 맞은 유씨는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다시 대만으로 가게됐다.
이때 대만에는 국민당 정부가 옮겨와 있었다. 대만 국민당정부는 화교들중 대만으로 피난할 사람들을 위해 수송선을보내 7월19일 2백명의 화교들을 싣고 부산항을 떠났다. 유씨도 여기 끼었다.
대만에서 유씨는 국부군 대위 대우로 각군군사학교 동창회 간사일을 봤다. 그러나 얼마후인 51년초 유씨는 왕세유씨와 함께 다시 한국에 나오게 됐다. 화교 지원병을 모집해 한국군을 돕기 위해서 였다.
이런 계획이 처음에 어떻게 나왔는지 나로선 정확히 알수없지만 국민당정부에서도 적극적인 뒷받침을 해준것만은 틀림없다. 이때 이미 중공군은 한국전에 참전한 때로, 자유중국정부는 의용군 조직을 이에 대한 정치적 대응책의 하나로 지원했던 것같다. 군출신 민간인이던 왕세유씨도 본토시절부터 국민당정부의 일을 많이한 사람이었다.
한국에 나온 두 사람은 당시 대구에서 헌병대장을 하던 예관수대령과 접촉, 이뜻을 알렸다. 예씨는 다시 육본정보국장이던 김종평장군, HID대장 박경원대령등과 연락해 일을 추진했다.
얼마후 한국측에서도 수락의 뜻을 밝혔다. 활동내용은 중국인이란 점을 최대한 활용키위해 적진중의 첩보활동에 종사키로했다. HID와의 계약서도 작성했다. 자원대이니 만큼 일체의 경비는 참전자들 자신이 대고 한국측은 식사와 무기·차량등만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51년3월 부산HID지구대(대장 김홍렬소령)내에서 정식으로 부대가 창설됐다. 중국인부대라고해서 명칭도 「서울·차이니즈」(Seoul Chinese)의 「이니셜」인 SC지대로 정했다. 행정적 지휘는 왕씨가 맡았고 유씨는 군사활동관계 지도원을 맡았다. 명의상 SC지대장은 김용덕소령이었다.
대원모집도 순조롭게 진행돼 총2백명을 헤아렸다. 모두 한국에 살던 화교청년들이었다. 이중 무장공작대원으로 70여명이 뽑혔고, 나머지는 후방업무를 보도록 했다.
SC지대의 본부는 처음엔 서울사직공원옆의 한주택으로 정했으나 2개월후 청진동의 이시영씨저택자리로 옮겼다.
부대를 조직한 유씨는 공작대원들을 인솔해 문산 월룡면에서 10주간의 공작훈련을 받은후 활동을 시작했다.
대원들은 12명단위로 소조를 편성해 전방HID부대에 분산 배치시켰다. 이들의 임무는 적후방에 들어가 군사경보를 캐오는 가장 위험한 임무였다. 적진침투는 육·해·공 모든 「루트」를 이용했다.
황해도 연백·해주지역과 철원·금화·평강지역의 적후방 침투작전, 평남 성천·순천지역 공중투하 작전을 비롯해 함남 함흥북방의 해장침투에 의한 정보활동등 북녁 전역을 누비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당시 이들의 작전을 지휘한 한국군장교중엔 인천의 김일환대령, 서울의 박영석중령, 속초의 김동석소령등이 있었다.
최택원씨(총무처차관)·김룡태씨등도 당시 각지대에 배치된 SC대원들의 활동을 직접지켜본 사람들이다.
중공군이 참전한 때니만큼 중한 양국어에 모두 능통한 화교첩보원들은 활동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 이들은 월북할때는 항상 중공군옷과 북괴군 옷을 켭쳐입고 떠났다. 적진에서 중공군을 만나게 되면 재빨리 북괴군옷을 입고 한국인행세를 했다. 반대로 북괴군을 만났을때는 중국어를 해대며 중공군 행세를하면 문제없이 위기를 넘길수 있었다.
그래도 첩보활동은 생명을 내건 모험이었다. 적진에 들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대원들도 많았다. 한번, 두 번…. 침투공작횟수가 늘수록 못돌아올 확률도 커지기 마련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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