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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니 몽라셰와 꽃게의 만남은 황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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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호 23면

음식의 독특한 맛, 그리고 와인의 맛과 향과 빈티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있다. 사실 이런 황홀한 맛의 하모니는 인위적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지만 그 순간을 한번 경험하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는 높은 기준이 절로 생기게 된다. 경험한 자만의 특혜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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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게 각인된 화이트 와인과 음식의 최고 궁합은 지루한 샴페인 시음 기억에서부터 시작한다. 신문사에서 오랫동안 일한 K는 한번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다. 2000년대 초반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예의 편집증이 재발했다. 맛있는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제철 음식과 와인과의 궁합도 중요시했다. 꽃게 철이면 단숨에 서해안으로 달려가 직접 게를 사서 쪄오는 성실함(필자는 편집증이라 부른다)을 보여주곤 했는데, 필자의 역할은 K가 선택한 메뉴에 와인을 접목하는 것이었다.

그 날 저녁 K는 흰 스티로폼 박스에 방금 쪄낸 통통한 꽃게를 들고 와인바로 들어왔다. 필자는 부르고뉴의 대표적인 화이트 와인 중 하나인 1997년산 퓰리니 몽라셰, 부샤 페르 & 피스를 한 병 주문하고 적당한 온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샴페인 한 병을 마시기로 했다. 마침 적당한 샴페인이 있어 오픈했는데 향은 있었지만 맛은 죽어 있었다. 보통 온도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면 이런 현상이 나기 때문에 소믈리에에게 교체해 달라고 했다. 두 번째 역시 상태가 첫 번째와 다르지 않았다. 필자는 또다시 거절을 했고 세 번째, 네 번째 같은 샴페인을 오픈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많이 짜증이 났지만 이미 여러 병을 열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고 소믈리에 역시 끝을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결국 필자는 같은 종류가 아닌 다른 회사의 샴페인을 오픈해 보자고 제안했고 결과는 정상이었다. 다섯 번째 병만에, 그것도 회사가 다른 샴페인으로 성공한 것이다. 소믈리에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그제서야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 여름에 셀러 공사를 하면서 샴페인들을 밖에 잠시 놓아 둔 적이 있었다고 주인에게 들었단다. 그런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고 상황을 인정했다.

어렵게 얻은 샴페인이 거의 비워질 때쯤 꽃게가 접시에 담겨 나왔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게를 한입 물었더니 싱싱한 게살에서 느낄 수 있는 쫄깃함과 달착지근한 맛이 듬뿍 배어 나왔다. 여기에 미네랄과 오크 풍미가 적당하게 조화를 이룬 퓰리니 몽라셰 한 잔을 마시자 게 맛과 어우러져 입안에서 여러 맛이 요동쳤다. 진정한 조화로움이었다. “딱 어울린다”는 탄성이 모두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부르고뉴 코트 드 본에 위치한 퓰리니 몽라셰 마을 주변에서 생산되는 이 화이트는 복잡한 향과 맛을 섬세하게 갖고 있으며 이 지역 특유의 미네랄이 첨가되어 우아한 품위를 느끼게 해준다. 양념 없이 바다 특유의 신선한 맛을 그대로 살린 꽃게와 미네랄 성분이 풍부한 석회질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퓰리니 몽라셰의 미묘한 맛이 서로 보완하며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기어처럼 어울렸다.

그 후 여러 번 다른 회사의 퓰리니 몽라셰나 샤블리 와인과도 꽃게를 먹어 봤지만 그때만큼 만족할 수는 없었다. 첫 사랑과 첫 키스의 기억을 잊을 수 없듯 필자에게는 그 순간이 꽃게와 와인의 달콤한 첫 키스였다. 이제 필자는 다른 인연을 기다리며 셀러에 퓰리니 몽라셰 한 병을 모셔두었다. 헌데 그날이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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