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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국밥 봉사' 성공회 김한승 신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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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김한승 신부가 손님상에 올릴 국밥을 젓고 있다. 성공회 푸드뱅크 대표인 그는 일방적 베풂이 아닌 함께 나누는 세상을 소망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8일 오전 서울 덕수궁 옆 성공회빌딩. 1층에 세실극장이 있다.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 초입에 ‘정동국밥’ 간판이 보인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유명한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쓴 글씨다. 상호 위의 작은 글자 ‘맛있는 나눔’도 눈에 띈다.

 식당에 들어갔다. 45평(약 148㎡) 규모, 정갈하고 깔끔하다. 주메뉴는 6000원짜리 돼지국밥. 뽀얗게 우린 국물, 잘게 자른 고기가 맛깔스럽다. 한쪽 벽에 걸린 ‘후원설립자’ 명단에는 총 580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2012년 4월 개업 때 동참했던 이들이다. 식당 한쪽에는 도시락이 쌓여 있다. 관악·영등포구 일대 홀몸노인들에게 배달될 것이다.

 국밥집 주인장은 성공회 김한승(48) 신부. 농(弄)부터 걸었다. “국밥은 자주 드시겠어요.” “1주에 예닐곱 번 됩니다.” “이젠 많이 물리겠어요.” “아니요. 맛이 있거든요. 직장인이 많은 곳, 음식점으로는 입지가 좋지 않아 맛 하나에 승부를 걸었거든요.”

 정동국밥은 사회적기업이다. 국밥에서 나온 수익금 전액이 쪽방 주민. 독거노인, 노숙인, 결식아동 등에게 돌아간다.

 - 가게는 잘 돌아가나요.

 “창립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겼죠. 올해는 좋지 않아요. 세월호 비극 여파죠. 기업·관공서 저녁모임이 크게 줄었어요. 지난해 월평균 3000만원은 들어왔는데, 지난달에는 1800만원으로 뚝 떨어졌죠. 그렇다고 내색할 수도 없고.”

 - 수익금은 어떻게 쓰이죠.

 “화·금요일, 매주 도시락 450개를 배달합니다. 밑반찬도 나가고요. 목요일에는 서울역 노숙인에게 국밥을 나눠 줍니다. 지난해에는 7030그릇이 나갔는데, 올해에는 불경기로 5000그릇에 그칠 것 같아요.”

 - 왜 하필 국밥인가요.

 “혹시 아세요. 국밥이 한국에만 있는 음식이란 걸. 예전에는 장날이나 집안에 잔치가 있을 때 맛봤죠. 커다란 솥에 이것저것 펄펄 끓여 나눠 먹었잖아요. 공동체 음식이지요. 작고도, 꾸준한 나눔을 실천하는 데 제격이지요.”

 정동국밥은 지난달 중순 2호점을 열었다. 경기도 부천시 롯데백화점 뒤편 먹자골목에서다. 가맹비와 매출액의 일정 부분을 기부하는 ‘자선점(Charity Shop)’ 개념이다.

 - 국밥집 보급에 적극 뛰어든 건가요.

 “새 모델을 찾은 셈입니다. 초창기부터 가맹점 요구가 있었지만 준비가 덜 됐고요. 창업 희망자들에게 재료와 노하우를 전해 줍니다. 공익적 프랜차이즈죠.”

 - 음식장사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입소문이 났나 봐요. 한 달 만에 수익이 났어요. 가맹점을 계속 늘려갈 계획입니다. 목표는 무한정입니다. 한 곳에서 매달 10만원만 기부해도, 100곳이면 1000만원이잖아요.”

 - 재료는 어디서 가져오나요.

어려운 이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하는 행복밥차.

 “사회적기업지원법에 연계기업이라는 게 있습니다. 평안도찹쌀순대로 유명한 평원이 정동국밥의 연계기업입니다. 음식칼럼니스트 김순경씨의 소개로 알게 됐어요. 그쪽에서 흔쾌히 ‘돕겠다’고 화답했고요. 요즘엔 ‘국밥데이’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 국밥데이는 또 뭔가요.

 “기업·관공서 구내식당에 저희가 국물과 고기를 대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국밥을 메뉴에 포함시키는 겁니다. 점심 한 끼로도 기부를 하게 됩니다. 지난해 말부터 서울시청 식당에서 월 2회 시행하고 있습니다.”

 - 그게 별 도움이 되겠습니까.

 “ 1인당 200원 정도 남습니다. 1만 명이 먹으면 노숙인 1000명에게 국밥을 댈 수 있어요.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 비슷하죠. 대기업 몇 곳도 접촉 중입니다. 지속 가능한 모델이 될 수 있어요.”

 국밥 얘기가 이어지다 보니 ‘이분 정말 신부 맞아’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김 신부의 소신과 방향은 또렷했다. 1998년 성공회 푸드뱅크(팔고 남은 음식을 결식인에게 나눠 주는 운동) 설립을 시작으로 17년째 나눔문화 현장에서 뛰어온 그다. 어려운 가정 청소년이나 노숙인들의 인문학 독서운동도 꾸준히 펼쳐 왔다. 사회의 모퉁이로 몰려난 이들의 몸과 마음이 그의 교회이자 하느님이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고 했다.

 - 국내 푸드뱅크의 개척자로 꼽힙니다.

 “96년 미국에서 푸드뱅크를 처음 접했습니다. 97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YMCA·YWCA 등 6개 민간단체를 설득해 시작하게 됐어요. 98년 MBC와 매달 결식아동 돕기 생방송 캠페인을 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됐지요. 빈민·복지 문제에 문외한이었던 제가 사회에 눈을 뜨게 된 거죠.”

 - 푸드뱅크는 지금도 시행 중인가요.

 “전국 성공회 27개 지부에서 매일 1만2000여 명에게 한 끼 식사를 제공합니다. 도시락·국밥·빵 등 형태는 다양해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 사회에서 배가 고픈 이들이 6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 주먹밥 콘서트도 인기 있었습니다.

 “직장인이 점심과 문화를 즐기면서 사회에도 기여하는 방안을 생각하다가 주먹밥 콘서트를 착안했습니다. 서울 삼청각 조리장에게 주먹밥 만드는 법을 배우고, 홍익대 앞 공연기획자를 무작정 찾아가 뮤지션을 섭외했습니다. 2004년 정동 성공회성당에서 첫 행사를 열었어요. 2008년 상반기까지 총 460여 팀이 다녀갔습니다. 소녀시대·휘성·전인권 등 스타들도 참여했고요.”

 - 더 키울 수도 있었을 텐데요.

 “사회적기업 인증서까지 받았는데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8년 신종플루가 급속히 번지면서 모든 야외공연이 중단됐고 이후 수년간 노무현 전 대통령 타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천안함 폭침, 구제역 확산 등이 잇따르면서 행사를 이어 갈 수 없었어요. ‘한 끼 나눔’이란 국밥 아이디어가 주먹밥에서 비롯됐으니 만족합니다.”

 - 처음에는 목사를 희망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와 함께 살았습니다.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장로교 계열 신학대학에 들어갔는데 마찰이 있었어요. 교단 총회에서 목격한 고성과 욕설, 몸싸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연세대에 다시 입학했는데 그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김성수(84) 주교의 권유로 성공회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 그간 좌절·절망한 적은 없나요.

 “아무런 계산 없이, 선의로 함께 시작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이해관계 때문에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절망까지는 아닙니다. 그보다 빈부 차가 갈수록 더 커지는 게 큰 걱정입니다. 예전에는 20대 80의 사회였는데 지금은 1대 99의 사회가 회자하잖아요.”

 - 신부와 사회활동가, 혼란스럽지는 않나요.

 “아니요, 오히려 교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물건을 살 때 독일인은 ‘오래 쓸 수 있나요’를, 일본인은 ‘신제품인가요’를, 한국인은 ‘진짜예요, 가짜예요’를 묻는다고요. ‘내가, 믿음이, 그리고 교회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되뇌게 됐죠.”

 - 둘을 구분하는 기준이 있을까요.

 “동물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배고픈데 넘쳐나는 양식을 창고에 쌓아 두는 게 인간입니다. 탐욕 때문이죠. 왜 예수가 부자를 꾸짖었겠어요. 그런데 동물이 굶주리면 새끼를 잡아먹는 반면 사람은 둘이 먹을 걸 셋이 나눌 줄도 알죠. 그 선한 의지를 발현시켜야 합니다. 나눔이든, 기부든, 그런 사랑은 가난한 마음에서 시작될 겁니다.”

[S BOX] 솔로몬의 '헛되다', 불교의 '색즉시공'

김한승 신부의 한때 별명은 ‘김환상’이었다. 동료·선배 신부들이 붙인 이름이다. 현실에선 이루기 힘든 꿈을 좇는다는 의미에서 본명의 ‘한승’을 ‘환상’으로 바꿔 불렀다.

 “요즘도 주변에서 환상이라 하나요.”

 “아니요. 환상을 현실로 만들었다고 격려해 줍니다.”

 김 신부에게 평소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을 부탁했다. 그를 떠받치는 영성적 토대가 궁금해서였다.

 “좀 허무할 수 있는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구(聖句)는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입니다. 구약 전도서(傳道書) 1장 2절의 말씀입니다,”

 의외였다. 항상 새 일을 벌여왔던 그가 ‘헛되다’를 서슴없이 꼽다니…. 일종의 모순과 역설이 느껴졌다. ‘전도서’는 고대 이스라엘 솔로몬왕이 노년에 들어 인생의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읊은 책이다.

 “솔로몬은 세상의 호사와 부귀를 누렸습니다. 그의 마지막 고백인 셈이요. 저는 기독교의 출발이 여기에서 있다고 봅니다. 세상을 소유할, 세상을 누릴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들 또한 무너지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요.”

 김 신부는 허무주의적 태도를 뜻하는 게 아니라고 경계했다. 되레 삶을 적극적으로 임하는 힘이 된다고 했다. 눈앞의 물질적 세상, 그 너머를 볼 줄 아는 지혜의 목소리라고 했다.

 “사람의 주검을 보면 절로 깨닫게 됩니다, 유한한 인생, 다시 말해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에게 구원은 없을 겁니다.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과 통하는 대목입니다. 공(空)이라는 것을 전제해야만 공 뒤편의 것을 얻을 수 있고, 색(色)이라는 것의 허망함도 떨칠 수 있게 될 겁니다.”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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