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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란 건 해본 일이 없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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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대학 1년생들을 위한 핵심 교양 강의를 맡고 있는 M교수는 학기말이 되면 학생들에게 꼭 그 학기 수강보고서를 써내게 한다. 일종의 학기 프로젝트인 셈이다. 중간시험도 있고 기말시험도 있지만 학생들이 최종 학점을 받자면 수강기 제출이 필수적이다.

 M교수가 학생들의 수강기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주로 두 가지다. 첫째, 그는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자기 강의를 들으며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무엇을 배웠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는가”가 이 경우 그의 관심의 초점이다. 무엇을 배웠는가는 주로 ‘지식’ 습득에 관한 것이다. 그 부분에서의 성취의 정도는 시험으로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시험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생각’이라는 부분이다. 지금은 중등·고등 할 것 없이 교육의 초점이 지식 전수와 습득으로 이동해 있는 시대다. 물론 지식 습득은 교육의 필수 과정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이 달성하고자 하는 것의 반쪽이지 전부가 아니다. 다른 반쪽은 ‘생각하기’다. 머리에 지식은 담겨 있으면서 생각할 능력은 없거나 결손 상태일 때 교육은 절반의 성취로 끝난다. 이런 종류의 교육에서 세계가 얻게 되는 것은 잘해야 ‘착한 좀비’ 같은 것이다.

 학생들의 수강기에서 교수가 보고 싶어 하는 두 번째 문제는 ‘탈바꿈’에 관한 것이다. 학생들은 한 학기 강의를 듣고 공부하고 토론하는 동안 모종의 자기변화를 경험했을까, 아닐까? 이것이 그의 관심사다. 아무리 중요한 과목이라도 겨우 한 학기 수강만으로 학생들이 어떤 정신적 변화를 경험한다는 것은 좀체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자기성찰(“이 공부가 내게 일으킨 변화가 있는가?”)의 계기 앞에 자기를 노출시키는 일이다. 이런 노출을 통해서만 학생들은 자기가 공부한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 지식과 실천의 관계―개인적 삶과 공동체적 삶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는지 그 연결 관계가 조금씩 드러난다는 것도 이런 노출의 경험을 통해서다.

 대학에서 첫 학기 강의를 들은 신입생들이 써내는 수강기들은 대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19살짜리 신입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슨 고민거리들을 갖고 있을까? 담당 교수의 양해를 얻고 말한다면, 이 부분에서도 놀라운 고백이 많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한국에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올 때까지 (더 정확히는 대학에 들어와 그 강의를 듣게 되기까지) “한 번도 ‘생각’이란 것을 해본 일이 없었다”고 고백하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루 종일 생각하면서 살게 되어 있는 동물인데 생각이란 건 해본 일이 없다니? 학생들의 말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우리 머리로 찾아내본 일이 없고 어떤 질문에 대한 해답이나 응답을 우리 머리로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한국 교육의 실상을 아는 사람들은 이런 고백의 진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학생들의 수강보고서에서 두 번째로 놀라운 것은 대학 들어올 때까지 시험 성적 말고는 대학 강의가 부과하는 것과 같은 질문 때문에 고민해본 일이 없었다는 고백이다. 그들이 M교수 같은 사람들의 강의실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말하는 질문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왜 대학엘 다니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타인의 고통에 반응해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사회는 왜 이런 꼴로 돌아가는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내 삶을 이끄는 가치는 무엇일 수 있는가, 삶의 의미는 어디서 얻고 목적은 어디서 구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정답이 없기 때문에 중등교육 6년 동안 정답찾기 훈련만 받다가 대학에 온 사람에게는 그처럼 고민을 안기는 어렵고 낭패스러운 질문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런 질문과 고민거리들을 붙들고 씨름하게 하는 것이 삶을 준비시키는 교육이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이다.

도정일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 약력=하와이대 영문학박사,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 상임대표, 경희대 명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