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창간 14돌 기념 특별기획 의식조사를 읽고|최선영(시인·고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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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연재 『재미한국인들』-그들의 생활과 생각-을 흥미있게 읽었다. 2천1백92명의 재미교포를 상대로 한 실태조사의 결과는 미국을 가보지 못한 이들에게, 혹은 앞으로 이민을 계획하고 있는 이들에게 여러모로 자세한 지식과 도움을 주는 자료라 하겠다.
자기 나라를 떠나 타국에 이민을 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에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모험이란 상태가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는 2면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동에서 서로 간다는 것은 용모나 사고방식·생활양식·언어 등에 있어 극에서 극으로 닿는 것이기에 모험은 더욱 큰 비중의 양면을 지닐 수 있다.
이민을 가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무기는 이민을 가는 나라의 언어를 아는 일이다. 그 나라의 문화를 습득하기 위해서 언어를 알아야할 뿐 아니라 우선 생계의 수단으로서도 언어는 큰 자본임에 틀림없다.
재미교포들의 실태조사에서도 언어장애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47%가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면 53%가 결국 불편을 느낀다는 뜻이 된다.
언어의 장벽이 미국사회에서 소외감과 자기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좌절감의 감소로 한인들의 모임에 나가거나 전화의 긴 대화를 그 매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는 한계는 약간 모호한 데가 있다. 유치원원아 정도의 소박한 일상생활의 자기표현에서 벗어나 영어로 독서를 할 수 있는 정도로 일상생활을 이끌어 올린다면 과연 47%의 재미교포들이 그 정도의 선상에 도달할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생긴다.
실태조사가 지적했듯이 재미교포들의 수입은 미국가정의 평균연수입(2만2백「달러」)을 넘는 2만3천「달러」고 보면 상당한 수입수준에 있다.
나는 채소가게를 경영하고 있는 한 부부가 두 자녀의 등록비가 1년에 1인당 3천「달러」가 되는 사립학교에 보내고 있음을 안다. 그러기 위해 이 30대의 부부는 긴 노동시간과 고생스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허세보다 신용을 더 평가>
미국에 가면 일확천금이라도 하는 양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국을 잘 모르는 것이다. 미국사회란 많은 인종이 모여 살기 때문에 얼핏보면 허술한 것 같지만 질서있고 법으로 잘 짜여져 있어 단계를 거쳐가게 마련이다. 높은 임금과 수입은 그만큼 노동과 시간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 경제관념은 미국인들의 생활태도중의 하나다. 구두쇠 노릇하는 재미교포는 허세를 부리지 않고 자기분수에 알맞게 처신하는 미국인들의 경제관념을 배운 것이다. 미국인들은 사람을 그가 입고 있는 옷으로 혹은 장식품으로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허세보다는 그가 가지고있는 「크레디트·카드」(신용카드)가 더 말을 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이민생활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은 자녀들의 교육일 것이다.
미국엔 과외공부라는 것이 없고 학교의 성적이나 석차 등에 그다지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들은 수월하고 어린이들은 압박감이나 긴장감 없이 자유롭게 배우는 분위기를 가진다. 그리고 대개 교포자녀들의 학업수준은 높고 우수한 편으로 알고 있다.
미국에서 『10년이 되어야지』하는 말이 있다. 유학을 온 학생이 박사학위과정을 마치고 직장을 구하기까지는 10년이 걸리고 이민 온 수련의가 미국의사의 자격증을 얻어 병원에 직위를 찾아 정착하기까지도 10년이 걸린다. 그리고 미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거기에 흡수되어 정신적으로 정착하기까지 역시 10년의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민 5년 만에 단독주택을 마련하고 정착한다는 것은 10여년전의 유학생들의 정착에 비하면 매우 빠른 셈이다. 짧은 연한 내에 정착하기까지의 생활은 오직 『모은다』는 목적아래 생활은 오히려 수단이 되어 버리는 셈이다. 휴가도 한번 제대로 못 가고 긴장과 시간의 제한을 받는 생애 속에서 정서의 결핍증을 초래하는 결과도 있다.

<10년 지나면 자아에 눈떠>
나는 「뉴욕」근교에 살고있는 의사부인 김 여사가 10년 동안에 「뉴욕」시에 있는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을 한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다고 해서 놀란 일이 있다.
낮선 고장에서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불가피한 현상일는지도 모른다.
천년이 지나면 자기 자신을 돌볼 기회를 갖는다. 소위 자기신분(Self identity)을 찾으려고 한다. 김광정 교수가 지적한 이민 4단계의 『자아의식의 혼란기』가 바로 그것이다. 자기와 사회와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개인은 그가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자기를 실현한다』는 「헤겔」의 말을 실감하게 된다.
미국은 나의 조국이 아니기에 참여의 보람이 희박하고 자기실현의 기회를 충분히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전문직을 가지고 미국사회에서 비교적 적응하며 사는 층일수록 자의식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지성인의 지적 만족의 생리 때문이리라. <끝>
필자
▲33년생(46세)
▲효성여대(56년) 이화여대 대학원(61년) 졸업
▲65년 도미, 「뉴욕」「세인트존즈」대 대학원(68년)졸업,
▲78년 귀국, 현재 고려대·건국대서 교육학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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