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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화 불교근세백년(20)-강일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불교옹호회
조선불교 유신회가 사찰 급의 철폐를 주장하고 30본산 주지회의 제규의 개정을 요구하며 공의제도의 부활 등 한국불교의 개혁과 진흥책에 있어서 총독부 방침에 역행했던 것과는 달리, 총독부의 인가를 받고 총독부 정책에 순응하는 단체가 있었다.
그것은 1914년 12월 각황사에 세워진 불교진흥회였다.
이 불교진흥회는 이회광 스님을 대표로 하는 본산주지29명(보은 법주사 불참)이 11월 총독부에 인가를 신청하여 12월에 인가를 받았는데 그 설립취지문은『위로는 일본천황의 통치를 보필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복을 도모하고 불교를 진흥하며 우리동포로 하여금 모두가 불교에 귀의하게 하고자 해서 불교진흥회를 발기한다』고 밝혀 친일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회의 설립 당시 회주는 물론 이회광 스님이었으며 부회주는 30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인 강대련 스님이었다. 이회광 스님은 불교진흥회를 처음 구상했을 때는 30본산의 주지들과 발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강대련 스님이 자신과 김금담 스님(유정사주지)에 이어 연합사무소 위원장이 되어 전국사찰의 통할권을 갖고 좌우하게 되자 자기의 권리가 시든 줄로 알고 강대련 스님과 대립하고자 서울의 몇몇 유생들과 연락, 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자기의 권리를 옹호하러 했던 것이다.
그러한 이회광 스님의 행동은 대다수 승려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30본산 주지와 함께 불교진흥회를 발기하게 되었다. 회장이 된 이회광 스님은 자작 조중응과 여규형을 고문으로 추대하여 초지의 일부를 충족시켰다.
한편 총독부에서는 불교진흥회를 승려들의 손에 맡기는 것보다는 일반신도들, 특히 유력한 인사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1916년 1월 2일「데라우찌」(사내)총독은 신년하례에 온 30본산주지들에게『30본산 주지는 어떠한 방침과 어떠한 기관으로든지 몸과 마음을 불교진흥을 다하는데 바쳐 인민을 교화하고 정치상의 원조가 생기도록 하라』고 훈시했으며, 1월 5일 총독부「우사미」(자주미)내무장관은 30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 강대련 스님과 연합사무소 스님들을 초청하고 불교진흥회를 신도들에게 맡기라고 지시했다.
『불교진흥회는 오직 신도에게 위탁함이 타당하며, 회원의 모집은 진흥회에 가입하여 자기의 세력이나 사리를 도모하는 자는 환영하지 않아야 한다. 오직 일편단심으로 도덕적 사업을 성취하여 정부의 힘이 되고 사회의 모범이 되고 인민의 이익이 되도록 열성분자로 조직할 것이다.
이러한 인물은 지금도 존재하는 줄로 본관은 생각하며 회의 재정은 한푼이라도 승려에게 의뢰할 것이 아니다. 이는 오직 회원스스로가 자변함이 옳다.』
「우사미」내무장관의 말에서 애당초 불교진흥회는 이회광 스님의 복안이 총독부의 복안이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1917년 2월에는 그들의 뜻대로 불교진흥회는「우사미」가 지칭한 신도인 이완용과 권중현에게로 넘겨졌다. 이완용(백작) 권중현(자작) 한창수 (남작) 등은 종래의 불교진흥회가 발족한 이래 원만한 발전을 수행하지 못했고, 또 그러할 능력이 없으므로 이를 폐지하고 새로이 한국불교를 옹호하고 더욱더 신앙적인 수양을 쌓아 질소근면의 기둥을 흥성하게 하고 충량한 제국시민이 되기 위해 불교옹호회를 세운다고 했다. 본산 주지들의 냉대와 관권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괄목할 활동을 한 불교유신회에 비해 관권의 비호를 받으며 발족한 불교옹호회는 불교진흥회를 폐지한 것뿐, 전혀 활동을 하지 않고 우야무야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1921년 7월에는 일단 폐지되었던 불교진흥회는 임시총회를 갖고 회장에 김형렬, 부회장 신우균, 이사 김영진 외 25인, 평의원 윤식구 외 22인을 선출하고 활동을 꾀했으나 도노에 그치고 말았으며, 1922년 7월에는 다시 당국의 양해아래 불교협성회로 탈바꿈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불교협성회가 실패한 원인중의 하나는 불교협성회가 불교교무원의 후원을 받고있었기 때문에 전체 승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점이다. 김책암 스님 등은 불교협성회의 설립목적을 친일과 항일의 양파로 대립하고 있는 불교계의 화해에 두었으나 격렬한 양파의 감정을 풀지 못한 것이다.
이 양파의 대립이란 총무원과 구무원의 대립이다. 양파의 발생은 어떤 점에서는 유신회가 주장하는 혁신의 바람을 타고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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