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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568)|제65화 불교 근세 백년②강석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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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국의 본산주지들이 성토를 당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인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 스님을 종로 거리로 끌고 다니며 욕을 보인 젊은 승려들의 행동저변에는 항일정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본산이라고 하는 것은 한 종파에 속하는 사찰들을 총괄하는, 그 종파의 근본 도장이므로 행정적인 면에서만이 아니고 종교적 정신적인 면에서도 으뜸가는 사찰인 것이다. 이 같이 중요한 사찰의 주지는 종교적 정신적 지도자로서 그에 합당한 수행과 학덕이 겸비해 있어야 한다. 비록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주지라고 하나 불교가 우리 정신문화면에 끼친 점을 감안할 때 일개 본산의 주지라면 최소한의 민족적 자각은 있어야 했다.
불교계 혁신을 부르짖는 전국의 젊은 승려들에 의해 강대련 스님을 위시한 지도적 입장에 있는 전국의 본산 주지가 친일승려로 낙인찍힌 데는 당시의 상황 이외에도 한일합방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의 명치유신 이후 대륙진출의 야망을 갖게되면서 일본 불교의 각 종파에서는 다투어 우리나라에 진출할 것을 꾀하였다. 개항하거나 조차지가 생긴 곳에는 반드시 일본 승려들이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대륙진출을 노리는 일본 정부와 일본 승려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서로가 얼마나 뜻이 잘 맞았는지 알 수 있는 예로 일본 조동종의「다께다」(무전범지)라는 인물을 들 수가 있다. 이「다께다」라는 인물은 김왕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당의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동양의 평화는 조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그 전부가 걸렸다』고 했다. 그는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1890년 우리나라에 건너왔다.
그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현양사의 동인들과 국수주의적인 일인양인들을 모아 천우협단을 조직하여 동학군에 가세하고자 했다. 그것은 청일의 각축장이 된 우리나라에서 청국의 세력을 몰아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 뒤 동학군과 관군사이에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천우협단은 서울로 올라왔으나 동학 난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일본에 송환되고 말았다. 그는 이듬해 삼포공사의 청을 받아 다시 우리나라에 나왔으나 오래지 않아 민비 사건에 관련되어 삼포와 함께 광도의 감옥에 갇히게 됐다. 그러나 뒤에 사면되어 1906년 이등박문을 따라서 세 번째 우리나라에 오자 곧 친일파의 거두이자 일진회 회장이며 시천교 교주인 이용구(봉암)의 청을 받아 시천교의 고문이 됐다.
그는 시천교의 융성이 불교의 발전과 관련이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갖고 이용구와 함께 1907년 『권불교재흥서』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 글에서 그는 『나는 이번에 요동과 만주의 전장을 조문하고 온 일본의 고승 추산묵선화상과 경성에서 만나 한국 불교 재흥의 방법을 충분히 논의하였다.
그 방법은 각 사찰의 합의소를 경성에 설치하고 밤낮으로 흥교의 방법을 강구하며, 유능한 승려를 군·시에 파견해서 불법을 실하게 하고, 불교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며, 또 조선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일본의 고승들을 초청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일본의 관민이 고승을 대하는 태도를 보게 해야한다』고 했다.
이 권불교재흥서가 계기가 되어 1908년 해인사의 이회광등 각도 사찰의 대표 52명이 서울 원흥사에 모여 원종 종무원(대종정 이회광·고문 무전범지)을 만들고, 「다께다」는 이회광과 함께 일본 조동종과 한국 불교교단과의 합병을 추진했다.
「다께다」『동양평화와 조선의 문제…』이라든가 동학혁명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어 만행을 자행한 것, 민비 사건,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시천교의 고문이 되고 시천교의 융성이 불교의 재흥에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 등 승려의 본분과는 동떨어진 이 같은 그의 행적은 일제의 대륙침략에 일승이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또 권불교 재흥서의 내용이나 양국불교의 합병을 꾀하는 것 등은 일본의 종교적 침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뒤에 가서 총독부가 한국불교를 독립적으로 발전시킨다는 미명아래 제정한 사찰 영으로 인해「다께다」의 합병기도는 좌절되고 말지만 한국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겠다는 일인들의 뜻은 당시의 한국승려들에게 있어서는 고맙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므로 이회광을 비롯한 많은 승려들이 친일로 기울어지게 됐던 것이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일승이 가세하고 있는 「다께다」의 예와 함께 한국의 승려들을 결정적으로 친일로 치닫게 한 중요한 사건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일승「사노」(좌야전려)의 건의를 받아들여 김홍집 내각이 승려의 도성출입을 해금한 사건이다.
조선건국이래 불교를 억압해 온 정책에 의해 세종 말년에서 세조가 불교를 지원하던 수년동안과 명종 때 문정왕후가 섭정하던 몇 년, 그리고 임난 때 의승군이 세운 공으로 인하여 억불정책이 다소 누그러진 수년간을 제외하고는 5백년을 줄곧 핍박받으며 도성출입이 금해졌던 승려들에게 도성출입의 해금은 개벽과 같은 것이었으며, 일승 「사노」야말로 고마운 은인이 아닐 수 없었던 컷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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