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자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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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도 흔들리지않는 그 뭣은 있는가 보다.
아무리 인심이 야박해지고 세태가 거칠어져도 뭔가 곧고 밝은 것은 그래도 남아있는가 보다.
그러나 우리앞엔 그런게 한낱 애화로밖에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없는 슬픔을 씹는다.
8순의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부담이 되는걸 못내 안스러워 하던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곱게 소복 단장하고 요위에는「비닐」을 깔고, 「저승노자돈」으로 2천5백원을 머리맡에 염주와 함께놓고, 향을 피우고, 아랫방에는 수의를 내놓고, 그리고 안경을 낀채 잠자듯이 조용히 눈을 감고 저승으로 떠났다.
정녕 우리가 잊어온 아름다운 여상, 옛 할머니들이 알뜰하게 다듬고 닦아온 구슬처럼 아름다운 여심이 여기있는 것이다.
죽은 양할머니는 신식 교육은 전혀 모르고 자란 분이었다한다.
어쩌면 양반집 규수들이 으레 배우는 내훈이며 여사서도 읽어보지못한 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할머니는 뭣이 한국의 여인들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지를 삶을 통해 터득했고, 몸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설움을 이겨내다 못해 목숨을 끊은 것은 아니다. 그게 더욱 우리의 가슴을 뭉클거리게 만들어 준다.
이할머니에겐 모든 식구가 미국으로 이민갔지만 차마 홀어머니를 떼어 놓고 떠날 수 없다하여 3년동안을 홀로 모셔온 외아들도 있다.
그분 역시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였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부인과 아들딸과 헤어져 살아야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나 할까. 아직도 이런 집안이 있고 이런 마음씨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랑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를 다시 없이 가슴아프게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풍경을 보는 것과도 같은 것이기에-.
효도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메아리지는 심금의 고운 가락일뿐이다.
그걸 정리라고나 할까. 그 맑고 깊은 샘이 아직 메마르지않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한층 더 가슴아프게 만들어 주고 있다.
어머니에게는 아무리 아들이 60이 넘어도 역시 어린 자식처럼 측은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 아들에게 짐이 안되기위해서였다면 할머니의 저승길은 조금도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남은 아들의 슬픔은 뭣으로 달랠 수 있겠는지. 그에게 있어 이민은 그저 저주스럽기만 했음에 틀림이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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