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월드컵] 심장도 머리도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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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대표팀 막내 손흥민(왼쪽)이 27일 상파울루 코린치앙스 경기장에서 열린 벨기에전을 마친 뒤 눈물을 쏟아냈다. 선배인 한국영이 손흥민의 어깨를 안고 말없이 위로하고 있다. 손흥민은 2차전 알제리전에서 1골을 터트렸지만 마지막에는 웃지 못했다. [신화=뉴시스]

브라질 월드컵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조별리그 1무2패.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와 같은 성적이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본선에서 1승도 얻지 못한 것도 프랑스 월드컵 이후 16년 만이다.

 첫 경기에서 러시아와 1-1로 비기며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싶었지만 알제리와 치른 2차전에서 2-4로 완패했다. 27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최종전에서는 전반 44분 스테번 드푸르(26·포르투)가 퇴장당했지만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다. 그러다 후반 33분 얀 페르통언(27·토트넘)에게 역습을 당해 0-1로 무릎을 꿇었다.

벨기에전이 끝난 뒤 주장 구자철을 안고 위로하는 홍명보 감독(오른쪽). [상파울루=뉴스1]

 ◆생각 없는 로봇 축구=러시아와 비기며 16강에 진출한 바히드 할릴호지치(62) 알제리 감독은 한국 축구에 대해 “선수 개개인의 능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플레이가 지나치게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이었다”고 일침을 가했다. 판에 박힌 것 같다는 의미다.

 유럽 축구에서는 한국 축구를 ‘로봇’에 비유한다. 칭찬이 아니다. 융통성과 창의성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여서다. 한국은 0-1로 뒤진 후반에 다득점이 필요했지만 무기력하고 단조로운 플레이를 반복했다. 과감히 공격적으로 나서야 했지만 누구도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략도, 기술도, 투혼도 찾아볼 수 없는 ‘깡통 로봇’ 같은 축구였다.

 전술적인 다양성도 부족했다. 벨기에전에서 최전방에 박주영(29·아스널) 대신 김신욱(26·울산), 골키퍼 정성룡(29·수원) 대신 김승규를 선발 투입하며 전술 변화를 꾀했을 뿐 튀니지·가나와의 평가전부터 러시아·알제리전까지 똑같은 베스트 11과 전술로 경기에 임했다. 홍 감독의 카리스마는 강했지만 전술은 단조로웠고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위기나 기회 때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흔들리는 사령탑=대표팀은 선발 과정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23명 최종 엔트리가 지나치게 인연에 치우쳤다고 해서 ‘의리 논쟁’이 일었다. 소속팀에서 거의 출전하지 못한 박주영을 비롯해 런던 올림픽 때 멤버를 대거 발탁해서다. 박주영은 끝내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도리어 그가 빠진 후 한국의 공격이 살아났다. 선발은 감독의 권한이지만 책임도 피할 수 없다. 홍 감독이 “내 잘못이 제일 크다”고 인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홍 감독에게도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 있다. 지난해 7월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하고 최강희(54·전북) 감독이 물러난 후 개막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지휘봉을 잡았다. 훈련 기간이 크게 부족해 런던 올림픽 때부터 한솥밥을 먹으며 손발을 맞춰온 선수를 중심으로 팀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 대표팀 감독을 독이 든 성배라고들 한다. 월드컵 본선에 맞춰 4년 주기로 감독을 뽑은 뒤 임기를 보장해 주는 게 선진 축구의 기본 시스템이다. 한국은 너무 자주 감독을 바꾼다. 최근 한국 감독의 평균 재임 기간은 2년을 크게 밑돈다.

 홍 감독의 임기도 애매하다. 2015년 1월 아시안컵까지다. 월드컵에 맞춰 물러나거나 재계약하는 다른 나라 감독과 달리 거취도 오리무중이다. 홍 감독의 임기를 지켜주자는 주장과 차제에 유능한 외국인 감독을 모셔서 4년간 확실하게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 팽팽하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는 좋은 감독이 시장에 많이 나와 있는 시기다. 일본축구협회는 발 빠르게 차기 외국인 감독을 고르고 있다. 홍 감독은 벨기에전을 마친 후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어떤 게 올바른 길인지 판단하겠다”고 말해 자진 사퇴 의사를 비쳤다.

 ◆열망 사라진 선수들=체격조건이 좋아지고 유럽파가 크게 늘어나는 등 하드웨어는 향상되고 있지만 한국 축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투지’와 ‘승부근성’은 점차 사라지는 분위기다. 홍 감독이 ‘원 팀, 원 골, 원 스피리트’를 유난히 강조한 건 역설적으로 그게 예전에 비해 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드컵 예선 기간에 불거졌던 해외파와 국내파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노력이었다.

 월드컵 본선 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잡음이 팀 안팎에서 들렸다. 27일 쿠리치바에서 만난 아브람 그랜트(59) 전 첼시 감독은 “한국 축구대표팀 부진의 근본 원인은 정신적인 부분에 있었다”며 “정신적으로 강할 땐 좋은 경기를 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단번에 무너졌다”고 분석했다. 그랜트 감독은 “축구는 피라미드와 같다. 아래부터 기본적인 것들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정신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상파울루=송지훈 기자, 쿠리치바=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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