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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내가 사는 지옥에 부처가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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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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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풍경1: 불교학과 교수가 물었습니다. “지옥에는 부처가 있는가?” 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저마다 답을 냅니다. “없다. 부처는 당연히 극락에 있어야지” “있다. 지옥에 있는 중생을 구하려면 부처가 지옥에도 있어야지.” 그리스도교식으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지옥에도 그리스도가 있는가?” 그럼 답을 할 겁니다. “천만에. 그리스도는 천국에만 있다. 지옥에도 있다는 건 신성모독이다.” 아니면 이런 답이 나올까요. “지옥에는 그리스도가 없지만, 연옥에는 그리스도가 있다. 그래야 그들을 구원할 테니.” 그도 아니면 이건 어떤가요. “지옥도, 천국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세상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까.”

 #풍경2: 운문(雲門·864~949) 선사는 중국의 고승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란 선구(禪句)로 유명하죠. 그를 찾아온 사람이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 선사가 답했습니다. “마른 똥막대기다!” 지금도 절집에서 ‘파격 중 파격’으로 꼽히는 대답입니다. 부처를 똥막대기에 빗댔으니 말입니다. 이 또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부처의 깨달음은 낮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거다. 그러니 운문 스님이 부처를 똥막대기에 비유하지 않았나. 그렇게 보잘것없고, 초라하고, 소외된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부처처럼 섬겨야 할 대상이란 뜻이다.”

 그럼 대답을 바꿔볼까요. “부처는 금막대기다!” 이건 맞는 말입니까, 아니면 틀린 말입니까. 부처가 똥막대기일 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부처다’란 해석이 통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는 금막대기다’가 되면 그게 통하질 않습니다. 금막대기는 귀하고, 비싸고, 부유한 거니까요. 그렇다면 이 말은 운문 선사의 외침에 어긋난 말일까요. 부처는 똥막대기는 될 수 있지만, 금막대기는 될 수 없는 걸까요.

 그리스도교에는 “당신의 대문을 두드리는 낯선 손님, 그가 바로 예수다”란 말이 있습니다. 그 방문객이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이라면 “맞아, 그 말이 맞네.” 맞장구가 나옵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어줬는데, 하룻밤 재워줬는데, 그가 심술궂고 이기적이고 고마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여전히 그 낯선 손님이 예수일까요, 아니면 나쁜 놈일까요.

 우리는 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금막대기냐, 똥막대기냐. 선이냐, 악이냐. 그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을 만난 날은 ‘좋은 날’, 악한 사람을 만난 날은 ‘나쁜 날’이 됩니다. 날마다 좋은 날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운문 선사는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어떡하면 그게 가능할까요.

 ‘똥막대기’란 말에 열쇠가 있습니다.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부처는 똥막대기다. 그렇게 형편없고, 지저분하고, 냄새 나는 것도 부처다. 그러니 부처가 아닌 것이 어디 있겠나. 쇠막대기도, 금막대기도 똑같은 부처다. 그 공(空)한 바탕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온 세상이 부처다. 너도 부처고, 나도 부처다. 우리는 부처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운문 선사는 그렇게 똥과 금의 경계를 지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옥에도 부처가 있느냐?”는 물음이 참 어리석네요. 왜냐고요? 지옥이 바로 부처니까요. 그걸 못 보니까 지옥이 지옥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종종 일상을 지옥에 빗댑니다. 바빠서, 힘들어서, 슬퍼서 “지옥 같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처의 세계에 살면서도 ‘자신의 지옥’에 빠져 있는 건 아닐까요.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는 은촛대를 훔쳐가는 도둑(장발장)을 예수로 봤습니다. 그의 눈에는 모두가 예수더군요. 남들이 사는 지옥에서 그 신부는 천국을 살더군요. 그가 말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