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신문 보기 - 1990년 2월 13일 1면] 삼풍백화점 붕괴 19년, 그 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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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저도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예요.”

양갈래 머리에 앳된 얼굴. 졸업을 앞둔 한 소녀가 수줍게 웃고 있다. ‘매출 1위 백화점’은 졸업과 입학시즌을 맞아 다양한 행사로 분주한 모습이다. 1989년 12월 1일 삼풍백화점은 이렇게 강남 한복판에 화려하게 입성했다. 당시 내부 디자인은 탁 트인 ‘미국식 쇼핑몰’로 불리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보여주기식’ 설계가 불행의 씨앗이 될지 누가 알았을까.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 내부는 ‘찜통’이었다. 강남 부유층이 주 고객인 고급 백화점에 에어컨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다니…. 에스컬레이터 곳곳엔 천장에서 떨어지는 시멘트가루와 물을 받기 위한 양동이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스피커에선 ‘에어컨이 고장나서 수리 중’이라는 안내 방송만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날 이렇게 실내가 더웠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전부터 백화점 건물 옥상에 지름 20㎝의 균열이 나타났다. 하중 계산은 않고 건물 옥상에 무단으로 설치한 200톤짜리 냉각탑 때문이다. 더 큰 균열을 막기 위해 경영진은 냉각탑 안에 물을 빼야했고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껐다. 하지만 당시 백화점 내 수천 명의 고객과 직원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삼풍백화점 경영진들은 ‘건물 균열이 시작된 사실을 고객들에게 절대로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린 채 붕괴 직전 자신들만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이날 오후 5시 55분, 지어진 지 5년 밖에 안 된 삼풍백화점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사망 502명, 부상 937명, 실종 6명. 한국 전쟁 다음으로 최대 인명 피해다.

삼풍백화점과 세월호 사건은 매우 흡사하다. 당시 실종자 수가 최초 200명에서 하루아침에 400명으로 늘었다. 심지어 절단된 시신 몇 구를 모아 1구로 추산하기도 했다. 백화점 고위 간부들은 붕괴 조짐을 미리 알고 귀중품을 빼돌렸다. 사고 원인도 판박이다. 삼풍백화점은 원래 사무용 건물로 지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돌연 백화점으로 변경되며 구조물을 허물어 공간을 무리하게 확충했다.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기 위해 층간 벽체를 뚫었고 백화점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의 지름도 기존보다 4분의 1로 줄였다.

더 충격적인 건 아무런 보강공사없이 애초 4층으로 허가난 건물에 수천 톤의 시멘트를 쏟아부어 한 층을 더 증축했단 점이다. 옥상에 있던 29톤 가량의 에어컨 3대를 민원 때문에 반대편으로 옮기는 과정도 문제였다. 기중기를 사용하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직접 끌어서 옮겼고, 이는 옥상에 상당한 무리를 주게 됐다. 결국 부실공사로 하중을 견디지 못한 백화점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2014년 4월 16일 300여 명의 아이들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한 것도 무리한 증축이 원인이었다. 여객선에 더 많은 인원을 태우고 과적하기 위해 평형수를 비운 것이다. 선장과 선원 대부분이 이런 위험을 알았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만 하고 빠져나왔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지 벌써 19년이 지났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세월호 대참사는 사고를 막기 위한 제도가 없어서가 아니라 무리한 욕심과 비리 때문에 제도가 작동하지 않아 일어난 사고다. 비리를 척결하지 않으면 어떤 재난 대책도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을 두 사고가 여실히 보여줬다. 망가진 국가재난관리체계를 재정립하고 재난·안전 대책을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비리 척결을 위해 제도를 정립하고 실행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진우 기자 jw8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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