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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변호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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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선변호인은 국가가 피고인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해 선정하여 사건을 맡긴 변호사. 변호사의 수임료는 물론 국가부담이며 일정한 기준에 해당되는 사건에는 반드시 국선변호인을 선임하도록 형사소송법에 규정돼 있다.
그 정신은 피고인의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자는 것. 그러나 과연 국선 변호인이 피고인의 편에 서서 성실하게 그 임무를 다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왜 이 제도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을까.

<상고 이유서안내 자동기각>
법원의 선정에 따라 김모피고인(19·서울영등포구)의 절도사건을 맡은 H변호사는 지정된 날짜가 지나도록 상고이유서를 제출하지 않아 대법원으로부터 지난 2월27일 상고기각 판결을 받았다.
박모피고인(20·전주시)의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사건을 맡은 W변호사는 「상고 이유가 없다」는 상고이유서를 제출해 담당직원을 당황케 한적도 있다. 『피고인은 사건당시 소년이었으며 범행동기에비해 형량이과다하나 상고이유는 발견할 수없음』이라고 이변호사는밝혔던 것이다.
김피고인(17·서울도봉구)의 절도사건을 맡은 국선변호인 J변호사의 상고이유서를 보면 담당 변호사가 검사인지, 변호사인지 구별키 어렵다.『피고인의 공소사실은 인정할 수 있으나 양형이 부당하다』-.
변호인이 공소사실을 인정한다는 희한한 상고 이유서였다.
황피고인(19·경북대구시)의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사건을 맡은 K변호사는 고작『피고인의 양형(징역 단기8월∼장기l0월)이 부당하다』는 것을 상고이유로 내놨다.
이같은「양형부당」의 상고이유는 대부분의 국선변호인들이 써내는 「스테레오· 타입」.
대법원의 상고심은 주로 법률적용에 잘못이 있나 없나를 가리는것(법률심)이며 형량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상고를 하려면 양형이 10년이상의 징역이나 금고가 선고된 사건이어야한다(형사소송법383조4호). 따라서 징역10월이 선고된 사건을 상고하면서 「양형부당」이라는 이유를 붙인다는 것은 『이 사건을 기각시켜 주십시오』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더러는 『상고 이유가 없다고 사료됩니다』라느니 『상고 이유가 없음을 보고합니다』라는등 스스로 충실한 보고자임을 강조하는 국선변호인도 있다.

<힘껏뛰어 존경받은 사람도>
전국적으로 개업변호사는 8백72명(3월말현재). 국선이거나 사선을 가리지않고 대체적으로 성실한 변호인역할을 하는 사람이 많다.
L변호사는 2년전 춘천만화가게 여주인 피살사건 상고심의 국선변호인으로 선정된 일이 있다. 사건이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수사 및 재판기록만도 2천여「페이지」에 이르렀으나 L변호사는 꼬박 1주일동안 기록내용을 베꼈고 나중에는 그도 지치자 10여만원을 들여 모든 기록을 복사했다. L변호사는 방대한 재판·수사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60여「페이지」의 상고이유서를 작성했다.
비록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못했으나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 한「케이스」.
그는 국선변호인으로 지명이 되면 언제나 수사기록을 열람하고 필요한 증거수집·증인면담등 공판준비를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동료들간의 존경을 받고 있다.
국선 변호인이 반드시 선정되어야 하는 경우는 피고인이 ▲미성년자 ▲70세이상의 고령자 ▲농아자 ▲심신장애의 의심이 있는자 ▲빈곤한 사유등으로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한 자와 ▲사형·무기 또는 3년이상의 징역·금고에 해당하는 사건에 관하여 변호인을 선임하지 못한자(형사소송법33조·282조)등.
이런 제도가 일부 변호사들에게 외면받고 있는 으뜸되는 이유는 형식적인 수임료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1건에 수임료래야 고작1만원. 그나마 작년까지는 3천원씩 하던 것이 금년 1월부터 오른 것.
국선변호인은 관할법원이 그지역 개업 변호사를 윤번제로 지명하며 한변호사가 한달에 서울의 경우 1∼2건, 지방에서는 7∼8건씩 국선변호를 맡는다.
일본의 경우 1건에 3만2천「엔」(한화7만여원)이며 미국의 경우는 소요시간별로 계산, 1시간에 30∼40「달러」(1만5천∼2만원). 외국에 견주어 엄청나게 적은 1만원의 수임료로는 기록복사·자료수집·사건발생지 출장등의 경비를 충당할 수 없다는 것이 변호사들의 주장이다.

<사명감만으론 실효 못거둬>
국선변호인의 수임료가 싸다는 것이 국선변호가 소홀해지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변호사들은 자신들의 「직업윤리」에 흠이 있다고 자성하는 사람이 있고 법원이 국선변호인의 활동에 비협조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3월 30일 서울 제일변호사회관에서는 50여명의 변호사들이 모여 2시간동안 국선변호인제의 운요에 관해 스스로 반성하고 대책을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다.
서울 및 서울제일변호사회등 2개단체가 공동으로 마련한 이 자리에서 변호사들은 스스로의자세를채찍질했다.
그러나 일부 변호사들은 이 자리에서 기록열람·피고인 접견·공판기일지정등 과정에서 법원이 국선변호인들에게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법원직원들이 기록을 열람하려는 국선변호인들에게 쉽게 응해주지않아 바쁜 변호사들의 시간을 빼앗아가고있다고했다.
또 현재 구치소까지 가야만 피고인 접견이 가능한 규정을 고쳐 국선변호인은 법정 옆에서 쉽게 만날 수 있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주장도 타당한 것이겠으나 변호인들이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한다는 사명감과 자기직업에대한 윤리관을 확립해야 하겠다는것이 다른쪽 사람들이 국선변호인들에게 내놓는 주문이다. 국선변호인 제도가 있으나 마나한 제도라면 개선책을 과감히 마련해나가야 할 것같다. <정일상·김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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