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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망국의 설움 외국에 처음알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삼별초의 대일포첩내용-이우성(성대교수.국사학)>
『강화에 천도한지 근 40년만에 몽고와의 강화가 실어 다시 진도에 천도 했다』라는 내용의 통첩이 「고려왕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전달됐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다.이 통첩이 「진도정부」의 사자에 의해 당시 겸창의 막부를 거쳐 경도의 일본조정에 접수된 것은 1271년, 즉 일본 문영8년9월2일이었다.
지난77년 가을 경도에서 역사연구대회가 있었는데 그때 여러학자들과 한담하는 자리에 삼별초의 대 일본 교섭문서가 동경대학사료편찬소에서 발견됐다는 소문이 들려와서 좌중을 흥분시켰다. 그 발견자는 석정정민씨(사료편찬소 근무)였는데 그는 발해관계 발표로 나와 의견교환이 있었고 펑소 동대연구실에서 가끔 만났던 사이였다.
동경에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그것은 삼별초가 보내온 문서의 실물이 아니고 「고려첩상부번조조」라는 표제하에 삼별초가보내온 「고려첩상」에 대해 그 중요한 사항 또는 의문스러운 점을 조목조목 적요해 놓은 것이었다. 지질이나 필사형태로 보아 후세의 것이 아니고 이 통첩을 받은 당시 일본관사의 손에서 된것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기록방식을「부번조조」라고 한 것은 일본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동양문고에서 전시한 일본고문서에서 몇종의 같은 사례를 직접 본바도 있었다.
비록 삼별초의 문서의 실물을 아니지만 내용으로보아 삼별초에 관한 귀중한 사료이며 특히 고려사전공자에게 시급한 연구제목이 되는 것이므로 우선 서울로 이기백교수에게 소식을 알리고 원형대의 복사물 한 장을 보냈다.
그해 12월 하순 발견자인 석정정민씨의 일차적인 구두발표가 동경사료편찬소에서 있어 들을 기회를 가졌는데 이 사료에 대한 고증과 문구의 해독이 정확했고 시대 배경의 설명도 자세한 편이었지만 결국 일본인의 입장에서 다룬 것이어서 미진하게 여겨지는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그때 나는 미국으로 향발하려면 직전이었으므로 더 이상 그와 조용히 토론할 시간도 없이 헤어졌고 그 뒤 귀국해서는 늘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의 보고가 활자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어느 잡지에 실린 석정씨의 연구보고를 입수하게 되어 우선 이 사료를 우리학계에 널리 소개할겸 몇마디 언급을 하고자하는 것이다.
위에 「진도정부」라고 한 것은 더말할 필요없이 강화시대 말기에 삼별초군대 지휘자들이 몽고에의 굴복에의한 개성천도를 거부하면서 별도로 고려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그 밑에 정부관서를 설치하는 한편 강화로부터 진도로 옮겨 몽고에 대한 국민들의 최후까지의 항전을 호소하고 지도했던 정권이다.
당시 이러한 호소에 대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의 백성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일어났고 이 위세에 놀란 지방수령들은 바람에 쓰러지듯 합류했으며 그렇지 않은 수령은 백성들의 손에 죽게된 형편이었다.
이렇듯 지방민중의 지지위에 서있었던 「진도정부」는 자신과 정의감에 차있었다. 일본에 대한 통첩은 독 이 시기의 것이었다.
이 통첩에 대한 일본측의 적요, 즉 「고려첩상부번조조」는 모두 12개조로 되어있다. 이 통첩은 여러 가지로 일본 조정을 당혹케 했지만 특히 제1,2조는 몽고에 대한 태도가 종전 강화시대의 것과 크게 다르고 몽고의 년호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했다.
제3조는 「천완강화,근사십년,피발좌유,악현소악, 잉우조도진도」라하여 몽고의 야만적 습속에 동화할수 없어 진도로 천도했음을 밝힌것이고 제7조는 고려가 삼한을 통합한 당당한 대국임을 말한 것으로, 따라서 자주독립을 지키는 진도정부의 역사적 정통성을 내세운것이고 제8조는 지금 비록 소란의 와중에 있지만 천시가 오면 사직이 안녕하게될 것이라는 소신을 피력한 것이다.
제11, 12조는 일본관의 상호통교를 위한 것으로 진도정부가 우선 자기 존재를 국제적으로 알리고 장차의 대외관계의 시석을 삼으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제5조는 주목될만한다. 즉 일본교류민들을 진도정부가 보호 환송시킨 것으로 우선 인도적 견지에서, 그리고 일본에 호의를 표해 두자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반동화된 개성정부와 세계적 침략자인 몽고군의 야합에 의한 엄청난 물량공세로 진도정부가 큰 타격을 입었고 마침내 제주에서 전원 옥쇄로 비극의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 불굴의 저항정신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대일통첩은 그 불굴의 정신위에 유연한 자세마저 보여주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이 통첩은 일본표류민을 보내주면서 진도정부자신의 입장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상호통교를 제의하는 외교문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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