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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워킹맘 칼럼

아이와 씨름하는 지금이 제일 좋을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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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이용란
서울대 미학과 박사 수료

“아이 키울 때가 젤 좋을 때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다니면 길에서 마주치는 할머니들은 내게 종종 이렇게 말한다. 웃으며 그렇다고 답하곤 하지만 속으로는 ‘제 인생에서 지금이 제일 힘들어요’라며 한숨을 내쉴 때가 더 많다. 아이들을 보살피다 보니 내 삶은 살필 틈 없이 흘러간다. 잠을 푹 자본 적이, 친구들과 여유로운 커피 한잔을 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마저 가물가물하다. 말하자면 인생에서 나 아닌 타인의 기본적이고도 절대적인 욕구들에 부응하기 위해 나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가 박탈당한 삶의 한때인 것이다. 큰아이 임신부터 따져보면 벌써 꼬박 4년째다.

 30개월, 9개월 아들 둘을 키우는 나는 전직 대학원생이다. 아니 현재는 그저 전업 엄마다. 그럴듯한 공식적인 신분은 대학원 박사 수료생이지만, 연구실에 나가 연구활동을 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으니, 여느 전업 엄마와 다를 바 없다. 첫째에게 티브이 만화를 틀어주고, 둘째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나면 이제 둘째를 업고 첫째에게 밥을 먹인다. 그러면서 나는 식탁 앞에 서서 국에 말아 몇 분 안에 후루룩 밥을 들이켜고, 옷은 언제나 축 늘어진 티셔츠 조각이다. 귀가 밝고 민감한 둘째는 새벽에도 몇 번씩 깨어 운다. 새벽 5시에 둘째가 완전히 눈을 뜨면 어수선한 분위기에 첫째도 같이 잠이 깬다. 똥오줌 기저귀를 갈고, 이유식 만들고 먹이고, 수유하고, 씻기고 입히고 어린이집 등원, 설거지, 빨래, 청소, 어린이집 하원 후 놀아주고 재우고 나면 저녁 9시. 또다시 쌓인 집안일을 해치우고 잠자리에 들면 밤 11시가 된다. 세 돌이 안 된 아이 둘을 키우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요즘이다.

 집안일과 육아에 지치다 보면 어느새 내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는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엄마’만 남는다. 때론 박사 수료가 뭐 대수라고, 아이들을 올바로 잘 키우는 게 젤 중요한 일이지라고 생각할 때도 많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공부하는 엄마’로서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희망의 끈을 놓칠 수 없다. 박사 수료까지 학교와 사회 그리고 많은 사람의 지원이 있었다. 이를 헛되이 만들 수는 없다. 또한 아이를 위해 내 삶을 희생했다는 변명도 하고 싶지 않다. 훗날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었을 때 ‘공부하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 그런 아이들로 키우고 싶다. 그리고 그럴 자격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수년 후 연구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는 나도 아이를 키우는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 있길 바라본다.

이용란 서울대 미학과 박사 수료
일러스트=김회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