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기자조선」은 다르다|「기자조선논문」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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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요며칠 사이에 기자조선에 관한 심심찮은 논란이 계속 일고있다.
요령성 대능하유역에서 「기후방정」과 「고죽뇌」등이 발견되었는바 이들 청동기유물은 소위 기자조선과 직접 연결시켰다는데서 문제점이 부각된 것같다.
우선 전문학술잡지가 아니므로 지상에서는 이형구씨의 논문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간단히 적어 논란이 분분한 기자조선의 정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몇가지 기준점과 문제점을 제시하려고 한다.
현재 학계에서 기자조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단군조선과 대치하였다는 기자조선은 이병총도선생이 이를 부인하고 한씨조선설을 내놓은바 있다. 기자에 관한 중국측 사료가 반드시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丁
중환선생 (동아대)도 기자의 동래를 부인하면서 동방족의 시조설화가 중국적으로 의인화된데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한바 있다. 이기백선생은 기자조선은 그 정체의 시비여하를 불문하고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에서 위만조선과 교체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천관우선생은 중국사료에 나오는 기자에 관한 사료를 정리하여 기자가 직접 족단을 이끌고 평양까지 왔다고 보기는 어렵고 동이족가운데 기자족으로 보이는 한 갈래가 주의 압력을 받아 산서성 태곡현에서 찬하(난하)하류를 지나 고죽국지역을 거치고 발해만ㆍ요동ㆍ요서를 경유, 대동강하루에 도달하였다고 보았다. 이것은 기자가 왔다는 의미가 아니며 그 일단의 기자족이 동내하였다는 내용이다.
필자는 문헌상에 보이는 사료가 있어 이를 그대로 믿는다 해도 한반도에 기자가 온것은 아니며 이미 이시기에 무문토기이래의 예맥족이 천동기문화를 갖고있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본인은 기자조선이 아니라 예맥조선이라 보고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가 BC 10세기 이전임을 주장한바 있다. 요령지역의 청동기가 예맥I기, 우리나라의 청동기가 예맥Ⅱ기라고 구분한바 있다. 대체로 이러한 견해가 학계일부에서 나온 견해들이었다.
이형구씨의 논문 「중국동북 신석기시대및 책동기시대의 문화」는 8장으로 구성되었다. 서설. 중국동북의 세석기문화, 중국동북의 채도문화, 요동반도신석기시대의 혼합문화, 하가점하층문화 ,하가점상층 청동기문화, 대능하유역 고죽국문화, 남산근 청동기문화가 각각의 제목들이다.
우선 각장의 제목에서 알수있듯이 국내학계에서는 대능하유역 고죽국문화편을 제외하면 나머지 제목들은 폭넓게 고고학과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대능하의 고죽국 문화만이 새로운 자료가 되는 셈이다.
중공에서 지난74년 발표되어 국내에서 즉각 이들 잡지를 구해본다는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국외에서 이 자료를 보고 새로운 해석을 기자조선과 연결시킨 점은 좋은 착안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논문제목이 말해 주듯이 이논문은 중국사의 변방지역사의 일환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국동북지방의 세석기에서부터 청동기시대까지를 그 시대범위로 잡고있을 뿐만아니라 고죽국의 장만이 문헌을 잠시 인용하였으뿐 나머지는 모두가 고고학의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논문은 고고학의 입장에서 동북사를 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이 고고학의 서술에는 그 히히 사용되는 계통론이 우선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된다.
중국의 신석기문화와 우리 신석기문화는 상이하다. 또 요령성일대에서 나오는 청동기는 단검인 경우 중국의 전통적인 유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공의 보고자들은 대체로 이 유물을 동호족의 것으로 늘 결론을 짓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유물과 연대만을 중시할뿐 유물을 남긴 주민을 해석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체에는 신경을 별로 쓰지않고 있었다. 필자는 이 유물이 동호족의 것이 아니고 우리 예맥족의 유물이라고 보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어쨌든 이 유물이 중국인의 것이 아니라고 보는 중공학자들의 견해에 대하여 이씨는 이에 대한 천착을 별로 하지 않고 있다. 만약에 이씨의 논조대로라면 아마도 이들 유물을 기자조선의 유민들이 남긴것으로 보는 것같다. 그러나 단검을 비롯한 이들 유물은 은말의 유물과는 상관이 없는 내 용물이다.
둘째, 이씨는 기자와 기자조선을 구별하지 않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여러 세중의 한가지 쪽을 그대로 택한 것같다. 기자와 기자조선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기자가, 또는 그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집단과 더불어 한반도 등지에 오지않은한 기자는 존재했을지 모르나 기자조선은 성립되기 어렵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대능하연안에서 나온 「기후」와 「고죽」의 명문이 담긴 유물은 은ㆍ주의 청동기롤 대표하는 유물이며 우리나라 청동기와는 현재까지는 연결되는 유물도 아니다. 그것은 기자로부로 시작된 유물도 아니고 그전부터 존재하였고 주대까지 계속 내려온 중국 은ㆍ주의 청동유물이므로 기자조선과 연결되려면 우리나라나 또는 여기에 가까운 지역에서라도 이들 유물이 출토되어야 할것이다.
적어도 만주와 우리나라에는 은대의 청동유물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있다. 이씨도 명문의 유물이 상(은)ㆍ주의 청동예기와 비슷하다고 결론에서 말한 바 있다.
세째, 기자와 고죽국을 바로 연결시키는 것도 더 조심해야할 사항이다. 이러한 사료는 시대가 훨씬 내려온 수ㆍ당의 사료에 가끔 나타나는 자료이며 더구나 고죽국은 백이ㆍ숙제의 전설과 관련있는 나라다.
이번에 나온 청동유물과 이러한 사실과를 간단히 언급한 것은 강전영홍 (동경외국어대교수)의 『왜국』(중앙공론사ㆍ1977년판)이란 책에도 이미 기술되어 있다.
네째, 청동기 유물을 논하면서 묘제인 석관묘가 중국동북지방의 특색이라고 보는 것은 더 고려해야될 점이다. 이러한 묘제는 북부「유라시아」에서부터 「시베리아」ㆍ 한국ㆍ 일본ㆍ만주ㆍ몽고등지에 확대돼 있다고 정덕곤(중국의 세계적 고고학자)은 보았고, 「예트마」(독일고고학자)는 「시베리아」 청동기문화인 「카라스크」(1300~800BC) 문화의 특색이라고 본바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돌멘」과 함께 널리 산재되어 있다.
이 묘제는 「시베리아」등지에서 내려온 문화이며 이것이 요령지방ㆍ한국 만주등지에 퍼지게 된 것이다.
이씨가 결론부분에서 내린 것처럼 축조기술로 보아 그 지역에서 생긴 것으로 보는것은 문제가 있다. 이 점에서 이씨는 중공의 자료에만 사로잡혀 주변 국가의 자료를 폭넓게 보지 못한 것같고 심지어 비파형 단검이 요령성에서도 나오지만 국내에서도 많이 출토된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후일에 첨가해야 될 일이라고 보고자 한다.
요컨대 은의 유물은 출토되는 지역에 한계가 있다. 그리고 기자조선의 문학가 중국청동기문화를 주도한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동이족의 개념과 그 적용의 한계를 확대해석했기 때문인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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