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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봉투'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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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채인택
논설위원

주일대사를 마치고 15일 귀국한 이병기 국가정보원장 후보자가 공항에서 취재진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이 우울하다. 정보기관 개혁이나 정치적 중립, 정보능력 강화 같은 업무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후보자는 제일성으로 “이유나 경위야 어쨌든 지난 시절 불미스러웠던 일은 늘 국민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며 이른바 ‘차떼기 사건’과 관련해 사과부터 했다.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불법 대선자금 전달책 역할을 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던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 후보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인사청문회에서 소상하게 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청문회의 핵심이 자질 검증과 앞으로의 포부가 아닌 과거 들추기가 될 게 뻔하다. 검증보다 낙마에 무게를 둔 힐난과 이를 피하려는 해명의 공방 속에서 정보기관 미래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국정원장으로 임명된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 지금 국정원은 말 그대로 갈림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게 신뢰의 위기다. 정보기관은 기본적으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추구하는’ 조직이다. 따라서 하는 일이 다 알려져선 곤란하다. 칭찬받을 일도 국정 책임자급만 알고 조용히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재판을 받고 비난받을 일이 줄줄이 터졌으니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느냐는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앞으로 원장에 임명되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음지와 양지를 확실히 구분하는 일일 것이다. 사실 사선을 넘나드는 정보와 공작의 현장에선 온갖 비합법적인 수단이 난무하게 마련이다. 특히 적을 속이는 기만공작은 정보전쟁에서 사용하는 기본 전술의 하나다. 하지만 그런 흑기술은 아무도 모르는 음지에서나 사용할 일이고 양지에서 벌어지는 재판 등에선 오로지 법과 원칙에 따르도록 조직 체질을 바꿔야 한다. 정보기관 간부와 현장요원이 법정에 서는 불상사가 다시는 없도록 해야 한다.

 직원 사기진작도 중요하다. 정보 관련 분야에서 근무했던 분들을 최근 만나 국정원이 거듭나기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뭔지를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사기진작을 거론했다. 복지를 늘리고 근무환경을 개선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기진작의 핵심은 정보요원으로서 긍지를 높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 방법을 물었더니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한 원로는 정권이 바뀌면 으레 등장하는 ‘노란 봉투’를 아느냐고 물었다. 노란 봉투는 사실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노태우 당시 대통령을 만나러 갈 때 처음 등장해 그 이후 정권교체기 때마다 회자했다. 당시 당선자가 들고 있던 노란 봉투에는 정보기관의 숨은 조력자들이 전달해준 알토란 같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 주로 전임 정권의 급소와 관련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이 봉투를 들게 됨으로써 당선자는 비로소 힘을 얻게 되고 권력이동을 실감했다고 한다. 임기 도중에도 대통령의 힘이 빠지면 차기 실력자들이 이를 들고 다니게 된다. 이는 정권에 줄을 대려고 하면서 권력의 해바라기가 된 일부 정보기관 근무자의 실태를 보여주는 아픈 증거라고 원로들은 혀를 찼다.

 이런 행태는 일부 전임 원장들의 행동이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다. 원장들은 조직을 으레 ‘우리 편’으로 바꿨다. 전임 정권에서 잘나갔다는 이유로 보직을 바꾸고 심지어 퇴직시키기까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평생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보직간부들을 군부대에 보내 정신교육을 한답시고 공수훈련을 시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는 증언이다. 심지어 반성문을 수양록에 쓰도록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직원들이 이런 일을 당하다 보면 다음 정권에 줄을 잘 서야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보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려면 인사와 관련한 이런 고리부터 끊어야 한다. 원장이 새로 임명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다. 원장이 임명권자를 위한다고 법과 원칙을 뛰어넘는다든지, 조직을 정치권 해바라기로 방치하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정권은 임기제이지만 정보기관의 임무는 시한이 없기 때문이다.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