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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간의 대화단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중·고교 학생들의 대부분이 학업과 진로문제, 가정과 남녀교제 등에서 오는 개인적인 고민을 교사들과 의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국 행동과학연구소의 조사결과 밝혀졌다.
이 조사는 학생2천1백70명, 학부모9백87명, 교사9백l3명을 대상으로 한 부분적인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교수와 대학관계를 유지하고 있는·학생이 조사대장학생의5·2%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제관계의 단절을 새삼 절감케 해주는 우려할만한 정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오늘날도 믿음과 사랑으로 맺어진 아름다운 사제관계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근래 들어 매우 천박한 방향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다는 관찰에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현대의 상황은『뛰어난 구사는 많아도 참다운 스승은 없다』고 하는 개탄의 소리를 듣는다.
오늘날 학교 교육은 이념상으로는 인문교육을 내세우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상급학교 진학에 필요한 입시기술의 수수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상행위의 거래관계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사듯 수업료를 내고 기술을 사는 것이며, 거래가 끝나면 관계는 그것으로 종결된다.
교사들마저도 스스로를 단순히 학교사회의「샐러리맨」이나「티칭·머신」으로 비하시키려는 자학적 태도를 갖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사제간에 깊은 이해와 존경, 그리고 애정이 싹틀 수는 없다.
스승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단순한 지식의 풍부함이나 그것을 가르치는 기술이 능숙한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존경과 신뢰는 언제나 인격적인 감화와 공조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것이다.
학생들은 스승의 전인격이 투영된 가르침의 한마디, 꾸짖음의 한마디가 평생을 통한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길 때, 비로소 그 스승을 우러러보고 존경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오늘날 가정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심한 번민과 좌절을 겪으며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고민을 털어놓고 상의할 수 있을 만큼 존경 할 스승이 없다는 것만큼 더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교육법상으로는 모든 중·고교에 생활지도책을 세우고, 상담을 전담하는 상당수의 교사를 두도록 의무화 돼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 법령의 요구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설사 있다 해도 평소 깊이 있는 상담을 통해 청소년문제의 예방 적 효과를 거둬야할 생활지도가 사후적발, 또는 처벌위주로 흘러 오히려 반발을 사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이 같은 실정은 이번 행동과학연구소의 조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학생들은 자신의 신상문제를 담임교사나 상담교사에게 상의하려해도 교사가 학생들의 고민과 문제를 이해해주기에 앞서 책망하거나 처벌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꺼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생활지도교사가「벌주는 사람」생활지도 실은「벌받는 장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 학생들이 어찌 진실로 교사와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승과 제자를 잇는 유대는 스승이 제자들과 사이에 대화의 통로를 열어놓고 그들 한사람 한사람과「마음의 접촉」을 갖고자 노력하는데서 강화될 수 있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교사들에 대한 사명감의 강조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문교육 보다 지식주입에 치중하는 현행 중·고교 교육의 맹점이 시정돼야 하고, 교사개개인의 자질이 향상될 수 있도록 교사에 대한 처우개선 등 국가적 대책이 강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교육환경의 개조가 사제윤리의 확립을 위해 시급한 과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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