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무적 북극을 가다|"한국극지탐험대" 설상장정 800km<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극지탐험이 순간 순간의 위험을 동반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연속이라고는 하지만「아이스·캡」위에서의 행동을 전개하기 전 「그린란드」 북단마을 「카낙」까지 들어가는 일은 더욱 어렵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기다림과 번거로움이 따랐다.
선발대가 「코펜하겐」에 도착하던 7월25일 「그린란드」 성의 담당자를 찾았을 때만 해도 「옙센」 이라는 사무관은 미대사관측의 불공평한 처사를 이유로 「그린란드」 입륙이 힘들게 되었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미대사관을 통해 미공군기지가 있는 「툴레」 기지의 통과 몇 편의 제공 요청을 보낸 것에 대해 미군당국이 「덴마크」 정부와는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허가를 내줄 움직임을 보인데 대한 반발이었다.

<「카낙」입륙싸고 실랑이도>
3일동안 실랑이를 거듭한 끝에 입국 허가를 받았으나 이번에는 미대사관측에서 군사항공우편이용, 통신대원의 기지체재, 조난때의 구조활동등 우리가 요청한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기지 통과를 허락할 수 없다고 날벼락을 내렸다.
추후 허가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그린란드」행 비행기를 타기로 하고 8월8일 「코펜하겐」 공항에 나간 대원들에게 대사관의 박성수공보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미측에서 기지통과를 인정한다는 공문을 오늘 아침에서야 보내 왔다는 것이었다.
5시간의 비행끝에 「그린란드」 에 닿자 「톨레」기지 사령관이 선심을 베풀어 공항에서 12km 떨어진 「둔다스」까지 「버스」를 내주었다. 「캠프」를 쳐 놓기는 했으나 이곳에서 북쭉으로 1백70km 떨어진 「카낙」까지는「헬리콥터」나 20시간 걸리는 배편뿐이고 1주일에 한번뿐인 「헬」기도 기상이 나쁘면 그나마 결항하기 일쑤라는 것이었다. 돈을 2배나 더 들여 3일만에 「헬」기를 전세 내는 행운을 잡았으나 비행기에 함께 온 줄 알았던 통신장비와 보도기재의 일부분이 행방불명되어 대원2명이 남아 기다리기로 했다.

<「카낙」항 헬기 결행일쑤>
8월 초순인데도 「둔다스」 에서는 눈발이 휘날렸고 안개와 바람만이 황량한 벌판과 백야를 장식했다. 눈·바람·짙은안개가 번갈아 가며 태양을 희롱, 출발은 하루하루 늦어졌다.
「헬」기를 내준 「그린란드」 교역조합(KGH)책임자 「퍼더슨」씨가 『「그린란드」는 이런 곳』 이라며 위로를 했으나 시야를 가리는 안개가 아니더라도 앞이 캄캄했다.
함께 남아있던 이광수대원은 걱정하다 못해 아예 몸살이 나 드러누웠고 식사도 하루 한 끼밖에 들지 않았다.
본대가 「카낙」으로 떠난지 7일, 짐을 찾아「헬」기를 기다린지 5일째 되는 날인 8월18일 갑자기 날씨가 활짝갰고 「헬」기가 오랜만에 시동을 걸었다. 「그린란드」에 도착하자마자 꼬박 10일을 썩힌 셈이다.
「카낙」에 도착한 본대는 곧 「에스키모」 고용계약에 나섰고 개썰매와 개식량을 준비하는 한편 8월24일로 예정된 장비·식량 도착을 기다려 2일후인 26일「아이스·캡」을 향해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에스키모」가운데는 여름이 끝나기 전의 탑험, 그것도 내륙으로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겨울철보다 힘들고 위험하다며 겨울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떠냐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름에는 빙하가 녹아내려 「크리배스」가 많이 형성되는데다 「아이스·캡」에 눈이 적고 표면이 딱딱한 얼음으로 노출되어 개 썰매가 달리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이었다.
겨울철의 결빙기를 기다려 극점을 가는 것이 일반적인 외국대의 경향인데 하필 험하고 높은 내륙 빙하로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얕잡듯이 묻는 측도 있었다.

<짙은안개 시야까지 가려>
우리는 내년도 남극 계획을 실명하면서 『탑험시기나 지리·기상조건이 비슷하여 「그린란드」 내륙을 택했고 진출 거리는 오히려 극점을 가는 것보다 긴 왕복1천km나 된다.
북극점에 도달하는 것이 더 영광스럽고 내륙빙하보다 바다의 기상 조건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외국대와 경쟁을 벌이러 온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목적은 만년 빙하에 익숙해지려는 훈련에 중점을 두고 있다』 고 말하니까 사뭇 놀란 듯 입을 다문다.
1971년 「이탈리아」 의 「귀도·몬지노」 대를 따라 북극점까지 갔다는 「토마스·키비옥」(44)의 도움으로 사냥 나갔던 「에스키모」 들을 불러들이고 인근 「허버트·아일랜드」와 60km 떨어진 「시오라팔루크」 등지에서도 지원자를 모아 11명을 채웠다. 이들 가운데는 대표적인 「트마스」 등 4명이 앞서의 「몬지노」, 영국의 「월릭·허버트」, 일본대 등과 함께 극점까지 가는등의 탐험 경험이 있었다. 「에스키모」 들은 일당을 5백 「크로네」(약5만원)씩이나 달라고 했다.
가까운 바다로 사냥을 나가도 하루 3백 「크로네」 정도의 수입은 쉽게 올릴 수 있으니 위험한 내륙빙하로 들어간다면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에스키모」 11명을 고용>
「에스키모」 말이 유창한 일본인 「오오시마·이꾸오」(대도육웅·32)를 내세워 일당을 3백50 「크로네」로 깎았다.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는 듯 했으나 우리 일정은 또 한번의 고비를 넘겼다.
24일 도착 예정이던 배가 풍랑으로 늦어진다는 것이었다. 현지 주민들의 말로는 배가 제날짜에 들어온 적이 거의 없어 지난 15년동안 정시 도착은 단 한번뿐이었다고 한다.
풍랑과 빙산의 상황에 따라 1주일, 심하면 10일이상 늦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북동풍을 타고 바다는 차차 물결이 세어졌고 대원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서 일정이 더 늦어진다면 목표 지점은 고사하고 기다리다가 시간을 다 보내게 될 것이 뻔했다, 23일 새벽 우리의 통역을 맡았던 「한스」 (「덴마크」인· 「카낙」신문 발행인· 교사) 가 황급히 우리를 찾았다.
「덴마크」를 떠나 「그린란드」 서해안을 따라 북상중인 배가 태풍 때문에 도중 「사비스비」 에 들르지 못하고 바람을 피해 바로 「카낙」으로 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그는 마치 자기일처럼 기뻐하며 전해 주었다. <홍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