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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호텔에 나타나 죽이겠다 북괴, 방 소 한국 학자 위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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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련에서 열린 국제 자연 보존 연맹(IUCN) 총회에 참석했던 한국 대표단 이민재(강원대 총장)·홍순우(서울대 교수)·김헌규(전 이대 교수)·원병오(경희대 교수)씨 등 4명은 회의 기간 중 북괴 대표단 및 공관원들로부터 생명에 위협을 받았으며 「모스크바」 공항에서 시내에 이르는 고속도로 장에서 1시간 동안 차량 추격전과 충돌 시도 등 온갖 시달림을 받다가 7일 새벽 무사히 소련을 빠져 나왔다.
일행 중 김헌규 박사는 회의장이 있는 「아슈하바드」에서부터 IUCN 사무국 직원들과 함께 전세기를 타고 「제네바」에 도착했고 이·홍·원 교수는 「모스크바」 공항에서 일본 항공편으로 서독의 「프랑크푸르트」에 도착, 「플라자·호텔」에서 긴장과 피로를 풀고 있다.
세 교수는 지난 13일간의 악몽에 대해서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으나, 북괴측의 협박과 방해 공작에 대해서는 띄엄띄엄 전해 주었다.
북괴측의 협박은 지난달 25일, 한국 대표단 일행이 동경에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투르크멘」 공화국의 「아슈하바드」로 향하는 소련 국내선 여객기 안에서부터 시작 됐다. 북괴 대표단의 이현복 등 4명이 「아슈하바드」행 국내선에 동승했는데, 이들은 계속 한국 대표단을 노려보고 자기들끼리 수근거렸다.
「아슈하바드」 도착 후 이 교수는 「인투리스트·호텔」에 나머지 세 교수는 「아슈하바드·호텔」에 각각 투숙했다. 북괴 대표들은 회의장에서나 「호텔」에서도 계속 한국 대표들을 감시하고 노려보는 등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
북괴측의 행패는 30일 밤부터 양쪽 「호텔」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이날 밤11시쯤 이 교수는 문을 잠그고 잠을 청하고 있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교수는 북괴측인 줄 직감하고 일체 응답하지 않았다. 북괴 사람들은 자정이 지나도록 10분 간격으로 「노크」를 하거나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으며 심지어는 발길질까지 하면서 『개××, 문열어』 라고 했다.
끝내 대답을 않자, 새벽2시20분까지는 전화로 신호를 계속 보냈다. 물론 전화를 받지 않은 이 교수는 「호텔」측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 교수는 새벽 1시가 지나 「호텔」을 빠져나가려다가 북괴의 이현복 등 2명이 「호텔」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이 교수는 새벽 5시까지 뜬눈으로 앉았다가 「택시」를 잡아 세 교수가 있는 「호텔」로 피신했다.
그러나 세 교수도 밤새도록 시달림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밤 11시쯤 「노크」 소리에 문을 연 원 교수는 북괴 사람과 마주쳤다.
원 교수는 그를 문밖으로 밀고 나가 복도에서 실랑이를 벌였는데 옆방의 홍 교수가 합세했다. 억센 평안도 사투리를 쓴 40대는 『나는 「타슈겐트」에서 살고 있는 교포 최 보리수라는 사람이요. 「타슈겐트」에는 조선 사람이 30만 명이나 살고 있고 여기 「아슈하바드」에도 1천명의 교포가 있다. 당신들은 반동 교수다. 교포 신문 「레닌의 기치」에 당신들 얘기가 나면 당신들은 맞아 죽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최는 『정치 얘기를 하자』고 요구했는데 원 교수 등이 『우리는 학자들인데 왜 당신 같은 사람하고 정치 얘기를 하겠는가. 이따위로 공갈하지 말고 물러나라』고 소리쳤다.
1일 상오 한국 대표단은 IUCN 부총재인 미국 대표 「탈버트」 교수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이날 상오 회의를 마치고 식당에서 마주친 북괴 대표는 『조선인끼리 해결해야지 왜 「양키」에게 얘기했느냐』고 시비를 걸어왔다.
6일 회의를 마친 일행은 미국과 서독 대표단과 함께 국내 선편으로 「모스크바」로 갔다. 일행이「모스크바」교외 「도모데도보」 공항에 도착했을 때 북괴 공관 번호판을 붙인 「볼가」 승용차 2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한국 대표단은 미국 대표 「토머스·넬슨」박사와 주한 대사관 농무관 「제임즈·브로」씨의 보호를 받으며, 대사관이 제공한 「밴」차에 타고 있는 동안 북대표와 공관원은 차를 둘러싸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하면서 『이××들 나오라,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미국 대표단 등 10여명이 중간에서 둘러싸 보호했으며 짐을 찾아 싣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이 통에 짐을 싣던 「넬슨」 박사가 떼밀려 손을 다쳤다. 「밴」차가 90「마일」의 고속으로 달리자 북괴 공관차가 추격하여 1시간 동안 진로를 방해하고 충돌을 시도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렸다.
「모스크바」시내로 진입하는 교차로에서 미국 대사관 「밴」차의 소련인 운전사가 교통경찰에 신고, 북괴 차를 인계함으로써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북괴 차는 고속도로 위에서 「밴」차를 앞질러 요리조리 앞길을 가로막거나 갑자기 속도를 줄여 급「브래이크」를 밟게 만들었고 뒤따라오면 서는 꽁무니를 들이받는 등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추격전의 장면을 연출했다. 【프랑크푸르트=이근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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