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의 상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6·25가 터지기 전의 일이다.
1950년1월9일, 전국의 종합병원장과 서울시 의사회간부 48명은 육군군의학교(경기도 부평 소재)에 들어갔다.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서다.
6·25를 예상했음인가.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의사들에게 일정기간 군사훈련을 시킨후 예비역 군의장교로 임관했다가 일단 유사시에 소집하겠다는 당국의 계획이 발표된 것이다.
당시 서울대학병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던 나도 당국의 명령에 따라 입교했다.
국립서울대학병원이 격이 높아서인지 군의학교에서는 나에게 번호1번을 주고 후보생 대표노릇을 하라고 명했다.
교관앞에서 『예비역군의후보생1번 김동익입니다』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시작된 만2주간의 군의학교생활은 시작됐다. 훈련은 지극히 엄격했고 고된 것이었다.
입교첫날 내린 명령이 『내무반의 벌겋게 달아오른 석탄난로를 1분이내에 깨끗이 끄도록 하라』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강훈련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2주간의 맹훈련끝에 단지 2명만이 탈락되고 46명에게 예비역장교임명의 특명이 내려졌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당시 의무감 윤치왕대령은 전원 중령 및 소령임명을 상신했다. 그러나 참모회의에서 사회적 경력과 지위, 그리고 박사학위 유무를 참작해서 점수제로 계산, 차등을 두어 중위에서 중령까지 임관발령했다(1월24일).
나와 백린제박사만이 중령으로 임관됐다.
이에 불만한 최성장(지난9월6일 작고)후보생이 똑같은 계급으로 임관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난폭한 언동을 했다. 이에 군의학교장 박동균대령이 크게 노해 군기숙청 운운하면서 큰소리로 호통을 치던 생각이 난다.
이렇듯 잡음이 생기자 당국의 이 계획은 단 한번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기어이 민족상잔의 비극 6·25는 발발하고 말았다.
앞으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6·25가 할퀴고 지나간 함춘원의 상처는 엄청나게 컸다.
그날 동요하는 병원직원들을 달래면서 나는 대학병원장으로서 우선 비상근무를 명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다 26일부터 밀려드는 전상환자는 시각을 다투듯 급격히 늘어나고, 들리는 얘기는 전세가 지극히 불리해서 서울이 위험하다니 다들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듯 갈피를 못 잡는다. 급한대로 나도 가족은 일단 27일 낮 한강을 건너서 영등포로 보냈다.
상황으로 보아서는 대학병원도 피난을 시켜야겠는데 「라디오」에서는 『서울이 절대로 안전하니 시민들은 추호도 동요하지말고 서울을 떠나지 말라』는 이승만대통령의 육성이 계속 방송되고 있지 않겠는가.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것이다. 이때 이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떠나 대전에 가 있었을 터인데 어떻게 해서 이같은 방송이 계속되었는지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기가 막힐 잎이었다.
27일밤 대학병원 시계탑위로 적의 포탄이 나는데도 서울이 안전하다니 어느 누가 믿겠는가. 모두들 혼비백산이었다. 나 자신도 단안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시간이 왔다.
촌각을 다투듯 사태는 위급하고 급박했다. 그러나 입원환자들을 병실에 그대로 두고 후퇴한다는 것이 더 할 수 없이 괴롭고 가슴이 아팠다.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야라 나하오.
뒤늦게 한강에 다다랐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대 이 어찌된 셈인가.
군인들이 앞을 가로 막고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니 말이다.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였다. 빈 군「트럭」이 내앞에 선다. 군인들이 이 「트럭」을 검문하는 사이 대학병원 운전사 전현길군이 황급히 차에 뛰어오르면서 나의 손을 잡아 끌어올렸던 것이다. 참으로 눈깜짝 할 순간이었다.
이 「트럭」이 한강다리를 건넌지 1분이나 되었을까. 뒤에서 천지를 뒤흔든 일대폭음이 울렸다. 이것이 바로 한강교 폭파였던것이다. 아슬아슬한 순간 전군은 나의 생명을 건져준 셈이다.
이렇게 해서 암담하고 불안한 피난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적군이 나의 피난길을 앞질러 남하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온양강가에 숨어 살았다. 9·28수복으로 나는 대학병원장에 복귀했다. 그러나 함춘원이 입은 상처는 도저히 치유불가능한 것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북으로 납치된 상당수의 교수들이다. 이갑수학장을 비롯해서 백린제병원장·이재복외과교수·김시창외과교수·신성우안과교수·박영돈이비인후과교수가 강제로 끌려갔고 최응석·이정복·이돈회·이부현·최회류·이병남교수등이 6·25를 전후해서 월북 또는 행방불명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외과대학의 임시관리책임자로 임명되어 상부지시에 따라 조사위원회를 조직, 적치하 대학병원에 남아 일했던 재직원에 대해 일일이 심사해서 부역인사를 가려내는 일이었다.
서울이 절대 안전하다는 대통령의 말을 믿고 남아 있다가 봉변을 당한 교직원도 있었고 생명을 보존키 위해 부득이 북괴에 협조하는 듯한 언동을 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동료를 버리고 재빨리 도피한 인사가 반드시 떳떳하다고만 할수 없지않은가.
그래서 나는 문제된 교직원들을 너그럽게 대하도록 노력했고 함춘원의 상처가 하루 빨리 치유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