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고수에게 듣는다] 뉴욕 찾은 가치투자 신사유람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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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호 18면

1871년 일본 메이지 정부는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서양 11개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이로부터 10년 후 조선의 고종 황제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기에도 많은 기업이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을 견학해 벤치마크함으로써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이처럼 앞서간 선험자들의 노하우를 배우고자 하는 욕구는 발전에의 자극과 밑거름이 됐다. 지난달 필자는 뉴욕으로 신사유람을 떠났다. 우리보다 30년 이상 앞서 길을 걸어간 미국의 가치투자 대가들을 만나 한 수 배우기 위해서였다. 가치투자로 유명한 뉴욕의 몇몇 자산운용사를 방문했더니 본인들의 노하우와 한국 시장에 대한 시각 등을 상세히 들려줬다. 이렇게 얻은 소중한 지혜와 느낌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더 길게, 더 많이 보는 게 실력
뉴욕 소재 운용사 중 한 곳은 44년간 누적수익률이 4만%에 이른다. 역사와 성과 모두 한국의 운용사들과 비교 불가한 격차를 보인다. 하지만 두뇌 차이가 이 정도 나는 건 아니다. 이들도 사람이고 가끔 실수도 한다. 1년 단위로 늘 최고의 성과만 올렸던 것도 아니다. 근원적인 실력의 차이는 세 가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첫째, 생각하는 시간의 길이가 우리보다 훨씬 길다. 많은 투자자가 외국인이 자금 규모가 커서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치투자에서의 진정한 힘은 사이즈가 아니라 시간의 길이에서 나온다. 기다릴 수 있으므로 호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저평가 기업을 자신 있게 보유할 수 있고 기업가치가 상승하는 기업을 10년 이상 보유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 운용사는 97년에 투자한 아모레퍼시픽을 지금껏 갖고 있다.

일러스트 강일구

둘째, 미국을 포함한 다양한 시장에 투자한다. 1900개 기업을 보는 팀보다 1만9000개의 기업을 보는 팀이 더 싸고 좋은 종목을 발굴할 확률이 큰 건 당연지사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시장에 속한 기업들을 알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시가총액 1000억원대의 한국 중소형주를 놓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모습에서 이들의 내공을 느꼈다. 동시에 우리도 어서 한국시장을 넘어 세계시장에서 최고의 종목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셋째, 오랜 역사 속에서 주식시장과 기업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을 경험으로 축적하고 있다. 우리가 산악전 경험 정도를 갖고 있다면 이들은 공중·수중·사막·정글에서 각기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고 있는 셈이다. 이런 능력은 주가 하락이 일시적인지, 구조적인지를 판별할 뿐 아니라 특정 비즈니스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계산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과거 KT&G가 외국인에 의해 재발견됐던 건 이 때문이다.

우선주와 보통주 괴리 납득 못해
가치투자의 대가들은 모두 한국에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통화기금(IMF) 시절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주식이 매우 싸게 거래되다 보니 좋은 투자 성과를 거뒀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총액이 순현금 보유액에도 못 미칠 정도로 저평가되고 1등 소비재 주식의 주가수익비율(PER)이 4~5배이던 시절이었다. 이들에겐 보물창고와도 같았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평가는 어느 정도 해소됐으니 이제는 한국 기업들이 기업가치를 올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예컨대 사내에 현금을 쌓아 놓고도 배당 지급, 자사주 매입, 인수합병(M&A) 등에 적극적이지 않은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즉 주주들을 위한 효율적인 자본배치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반대로 그런 풍토에서도 자본 배치를 열심히 하는 최고경영자(CEO)들에 대해선 높은 평가를 내렸다. 한국 주식의 재평가 계기는 이 지점에서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도 우선주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우선주가 최근 꽤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통주와의 괴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똑같이 사절단을 보냈지만 일본과 한국의 이후 모습은 크게 달랐다. 차이는 문제의식과 방향성에 있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시간만 흐른다고 해서 한국 투자자들의 실력이 저절로 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외국인이 한국 증시에서 돈을 쓸어간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그들의 앞선 방법을 빨리 익히고 이를 토대로 해외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해 가야 한다. 필자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누구보다 빨리 배우는 한국 민족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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