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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전무…김희규 교수 실종 18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물리학자 김희규 교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김 교수의 실종사건수사는 발생 18일이 지났으나 해결의 실마리를 잡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경찰은 실종신고가 있은 지 8일 후부터 자살·잠적·타의에 의한 실종 등 세 갈래로 수사를 벌여 왔으나 여성들과 관련된 잠적의 가능성만이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 수사방향을 결정지을 만한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동원된 경찰관만도 연인원 1만1백여 명. 김 교수 사진이든 전단 2만장을 뿌렸고 자살했거나 은신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전국의 사찰·암자·계곡·등산로·독가촌 등 1만3천여곳을 샅샅이 뒤졌으며 주변인물(가족·동료교수·여자)67명을 조사했으나 성과는「제로」.
첫째 경찰이 지금까지 수사결과 가장 유력하게 보는 수사방향은 자살의 가능성.
이는 ▲김 박사가 실종 2일전부터 문교부에 제출해야할 논문 때문에 수면제까지 복용할 정도로 고민했으며 ▲실종전날 친구인 조병하 교수에게 24일 열리게 되어있는 물리학회에 『참석 못할지도 모르겠다』며 자신의 신변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고 ▲실종당일 집안에 교수신분증과 주민등록증을 두고 집을 나서려한 점 ▲화공약품 상에서 극약을 사간 점등이다.
이 같은 객관적인 이유 외에 김 박사가 충격조울증에 가까운 신경쇠약을 앓은 병력(61년 「시카고」대 유학당시)이 있고 이 때문에 63년 경남진주 처가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한 사실이 있었으며 최근엔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는 간접적인 요인이 지적되고있다.
또 최근 들어 부인 한씨에게 자주 미안하단 말을 했으며 평소 월급에서 15만원씩을 떼어 용돈으로 쓰던 것을 5만원을 남기고 모두 부인에게 넘겨준(22일) 사실 등이다.
이 같은 사실이나 정황 등을 종합하면 학자적인 자존심과 긍지가 강했던 김 교수가 논문이나 다른 문제로 고민 끝에 조울증이 재발하여 실종 며칠 전부터 자살을 계획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자살가능성도 김 박사의 다른 행적과 일반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의문점이 많다.
첫째 논문자체가 자살을 유도할 만큼 강제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출기일을 연기할 수도 있고 논문제목을 바꿀 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 연구비를 반납하면 된다. 연구비반납으로 인한 권위의 실추와 자신이 자살함으로써 일어나는 사회적 물의 및 이에 따른 권위의 실추 중 어느 것이 학자인 그에게 더 치명적인 것인가는 김 박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김 교수는 실종 3일전까지만 해도 주택신축 문제로 건축업자와 만났으며 당시 진행중인 2녀의 혼담 등 가정 문제에 자상한 관심을 보인 점이다.
개인의 문제가 아무리 괴롭다해도 50을 넘은 가장으로 집안의 혼사(혼사), 자신의 보직문제(실종당일 총장을 만난 일)등에 관심을 쓴 그가 쉽사리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주위 사람들의 말이다.
그렇다면 김 박사는 여자문제 등 사생활의 고민으로 잠적한 것일까.
지금까지 수사결과 김 교수는 원한이나 재산문제로 인한 실종일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김 교수는 자신의 봉급 외에 의사인 부인 한원주씨의 수입도 많아 연구에만 전념, 원한이나 재산상의 갈등을 일으킬 요인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맥주「홀」「호스티스」이 모양(23)등 70년 이후 김 교수가 알고 있는 여자 7명을 조사했으나 이들의 행적이 모두 확인돼 이번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져 여자문제로 인한 자살이나 잠적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이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아직까지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은 타의에 의한 실종.
김 교수가 방위산업분야에 직접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물리학이란 연관학문을 연구하고 있는 데다 특히 한국물리학회 회장으로 그 직위와 학계의 연구정보를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 등이 이 가능성을 뒷받침하고있다.
생사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부모가 월남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 가능성과 관련지을 수 있다.
한 수사관계자는 ▲그가 실종당일 의도적으로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은 점 ▲실종전날 자신의 신변변화를 친지에게 암시한 점 ▲극약을 산 사실을 고의적으로 노출시킨 점 ▲학자로서는 지나치게 연구논문 문제 등 학문적인 고민을 친지들에게 호소한 점 ▲가정과 사회적 신분으로 미뤄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등도 이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는 사실로 지적했다.
서울시경의 수사본부를 비롯, 청량리·종로·중부 등 3개 경찰서에 수사전담반을 설치한 경찰은 이제 수사가 벽에 부딪쳤음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이제까지의 집중적이고 적극적인 수사방법에서 장기 수사체제로 바꿨다고 하지만 또 하나의 미제사건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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