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9)제58화 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 비사|50년대"문예"지 전후-조광현(5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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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연재를 마치며>
문협에 선거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68∼69년 전후의 일이고「예총」의 그것은 그보다 훨씬 먼저였다. 아직 말하지 못한 이 두 단체에 얽힌 뒷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한 5년 동안의「예륜」위원장, 2년 동안의 문인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4년 동안의 문인협회 이사장 시기에 있었던, 그리고「현대문학」을 20여년 맡아오면서 얽힌 많은 사연들, 또한 20여 년의 오직 생활에 얽힌 뒷이야기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 말할 수는 없다. 그중 에서도 각종의 필화 사건과 문단 관계의 형사사건 등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더욱 많다.
그러나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닌 것 같다. 앞으로 그 기회가 있으면 이곳에 못다한 이야기들을 더 보충하게 될 것이다.
다만 끝으로 몇 마디 이 기회에 부언해두고 싶은 것은 8·15해방이후 지금까지 30년 이상이나 나의 생활과 직책은 한결같이 문학과 문단에 관련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여러 차례의 문예지 발행과 운영, 여러 차례의 각종 문화단체의 요직, 이런 것들은 나의 그 동안의 생활과 행동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문화계와 문단과 관련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여러 가지 선의의 오해도 받았고, 부당한 악의의 비난도 받았다. 그런 것들이 때로는 나를 외롭게도 하고 슬프게도 했지만 별로 스스로를 변명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모르되 무엇인가 일을 하고 있는 이상 선의의 오해든 악의의 비난이든 그러한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미 체념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닌 평범하고 부덕한 한 인간으로서 항상 경직하게 일하려고 노력해 왔을 뿐이다. 앞으로도 물론 그렇겠지만 가능하다면 지금부터라도 남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일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떠나고 싶은 것이 요 근래의 심경이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일체의 단체활동에서 스스로를 멀리하고 있다. 문인들 상호간의 침묵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문학단체인데 단체 때문에 오히려 가까운 사이가 멀어지고 생각지도 않은 오해가 생기고 하는 것은 나의 가장 괴로운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러한 울타리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켰다고 생각하고있다. 박양균 씨가 여러번 말했듯이 나이에 비춰 나는 아직도 일선에서 은퇴할 나이는 아니다.
그러나 내 관심과 욕망은 이제 그러한 것에서는 졸업이 된 것 같다. 문단에서는 언제든지 나는 은퇴(?)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문학에서만 은퇴가 될 수 없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학교의 강의와「현대문학」을 꾸려나가는 일, 그리고 심심하면 바둑이나 두는 일, 이것만이 현재의 나의 소임의 전부다.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르겠다. 스스로 쓰고 싶은 글이 있어 쓰게된다면 나는 더욱 즐거울 것이다.
정해진 주제와 분량과 기한에 쫓기지 않고 쓰는 글은 참으로 즐겁다.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곤 싶은 것은 오래전부터의 소망이기도 했다.
이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내가 여러 선배와 친구들로부터 실로 얼마나 많은 도움과 은혜를 입어왔는가를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나는 몸도 허약하고 타고난 게으름뱅이인데다 옳게 학업을 마치지도 못했고. 그리고 문학적인 재능은 더욱 없었던 사람이다. 거기다가 아주 치명적인 것은 노력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내가 문단의 한 말석이나마 얼굴을 내밀 수 있었고, 20여년 동안 교직과 현대 문학사를 유지할 수 있었고, 20여권의 책을 낼 수 있었던 이모든 일들이 어찌 나의 능력의 결과일 수 있었겠는가.
나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와주고 지도해 준 여러 선배들과 문우들의 뒷받침에서가 아니었던가. 나에게 어떤 행운이 있었다면 그것은 언제나 나를 아껴주는 선배나 친구들이 갖다준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내가 보답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아가며 살아야만 사람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싶다.
1남2녀의 내 자식들이 스스로의 생활을 조금씩 조금씩 개척해 가고 있고 친손녀 외손녀가 넷씩이나 자라가는 것을 보는 것은 나의 큰 즐거움이며 보람이다.
마찬가지로 그 동안 나의 작은 힘일 망정 그것이 도움이 되어 문단에 나오고 학계에 진출하여 사회의 명망을 얻어 가는 많은 제자나 후배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요, 보람이다.
이 글이 발표되는 동안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준 곽학송 김영삼 그밖에 몇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문총 북한지부가 부산에서가 아니고 평양에서 오영진 김병기(화가) 김동진(작곡가) 김이이석 김영삼 양명문 원응서제씨에 의하여 조직되었고 1·4 후퇴 전에 월남한 문화인들은 참여되지 않았으며 김동인 선생께서 사망하신 것이 6·25 직후가 아니고 l·4 후퇴 시라고 지적해준 것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또한 아무리 세상이 다 알고있는 일이라 해도 새삼스럽게 연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 사람에 따라서는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은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나의 주의 부족으로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절대로 나의 본의가 아니었던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다음에 만일 책으로 될 때는 다 고쳐놓겠다.
그 동안 별 재미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온 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사과를 드린다. 남길만한 이야기도 아닌 것을 나의 기호와 신변에 따라 멋대로 쓴 것들도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이 말하면 정말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못하고 말았다. 세월은 사정없이 흘러가는데 나에게 남아 처지는 것은 무엇일까. 이 글을 끝맺는 나의 소박한 감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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