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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푸틴이 상하이에 간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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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러시아는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유라시아 중심부를 차지하는 나라다. 1712만5000㎢의 방대한 영토의 75%가 아시아 땅이고 나머지 25%가 유럽 땅이다. 그런 러시아 대륙은 자원 천지다. 그래서 러시아가 기침을 해도 그 충격파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퍼진다. 지난 21~22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상하이 방문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푸틴은 상하이에서 앞으로 이 지역 세력 균형에 지각변동적인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를 세 가지 역사적인 일을 했다.

 첫째, 푸틴은 2018년부터 30년간 시베리아산 가스를 중국에 수출하는 4000억 달러 계약에 서명하는 행사에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과 나란히 참석했다. 푸틴과 시진핑은 저마다의 이유로 미국 보란 듯이 힘차게 손을 잡은 것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유럽연합(EU)이 소련산 가스를 보이콧하는 강수를 두려는 움직임에 선제적으로 대응했고, 시진핑은 동·남중국해에서 중국과 영토분쟁 중인 상대국들을 후원하고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적극 지지하는 미국 오바마 정부에 효과적인 일격을 가한 셈이다. 중국은 또 시베리아에 안정된 가스 수입선을 확보함으로써 대도시들을 질식시킬 지경으로 악화되는 공기 오염 문제도 해결하고.

 둘째, 푸틴은 한국을 포함한 24개 회원국과 12개 옵서버가 참가한 아시아 교류·신뢰구축회의(CICA)를 시진핑과 함께 주도하여 이 기구를 미국의 아시아 중시전략(Pivot to Asia)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확대하겠다는 당찬 야망을 드러냈다. 역설적으로 한국 같은 미국의 동맹이 그 기구를 미국과의 대항구도로 끌고 가려는 러시아와 중국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가 주목된다. 실제로 한국은 이번 회의에서 정상선언 초안에 들어 있던 신아시아 안보 개념을 대폭 완화하는 데 앞장섰다. 이 성과는 미국·일본 대 중국·러시아 대결구도가 한국 외교의 블루오션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고무적인 현상이다.

 셋째, 푸틴은 시진핑과 함께 남중국해에서 실시되는 중국·러시아 해군 합동훈련의 출정행사에 참석하여 미국의 질서에 두 북방 강대국이 공동 대응한다는 메시지를 온 세상에 발신했다. 이것은 동중국해의 센카쿠나 남중국해에서 미국의 후견 아래 있는 나라들과 중국이 무력충돌을 벌일 경우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기지를 둔 러시아 극동함대가 중국의 든든한 “기댈 언덕”이 된다는 의미다. 이런 배경에서 푸틴은 귀국하자마자 일본과의 쿠릴열도 일부 반환협상에서 지금까지의 유연한 입장에서 강경 입장으로 선회하는 발언을 하여 일본을 긴장시킨다.

 4000억 달러 가스 계약, CICA 주도, 그리고 해군합동훈련으로 경제와 외교와 군사의 세 방면에서 두 북방 대국의 공동 보조의 틀이 갖추어진 셈이다. 미국의 반응은 어떨까. 중앙일보·CSIS 포럼에 참석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 두 명의 의견을 들었다.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 부장관은 “아직은” 전략적인 의미가 미미하다고 낙관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커트 캠벨 전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사태를 심각하게 봤다. 그는 미국이 상하이 현상에 맞게 동아시아 전략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중국에 수출하는 가스는 단순한 경제상품이 아니라 전략상품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었다. 옳은 판단인 것 같다.

 제주평화포럼에서 만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한국이 CICA 정상회의에서 한 역할을 예로 들면서 미국 대 중국·러시아 대결에서 한국 같은 나라가 활용할 자산이 많을 것이라고 암시했다. 도전과 위기는 기회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거기 일본과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가담하면 주변 4강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 외교는 결코 쉽지 않을 과제를 떠안게 된다. 우리가 안보를 의존하는 미국과 경제를 의존하는 중국이 다투는 틈바구니에서 비스마르크와 키신저의 외교적 자질과 비전과 전략이 요구된다. 우리 외교에 그만한 인적자원이 있는지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따지고 곧 있을 정부요직 개편에 그 결론을 반영해야 한다.

 먼저 할 일은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러시아 외교를 훨씬 강화해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러시아 측은 항상 한국이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노태우·고르바초프가 성사시킨 역사적인 한·소 수교 때를 생각하면 우리는 러시아 외교에 더 열정을 보여야 할 것 같다. 중국 외교도 요란한 구호만큼, 양적인 성장만큼 한·중 관계가 따라 주는가. 한국의 균형 잡힌 안보와 경제적인 번영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통일외교에서도 한·중, 한·러 관계는 핵심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지금 서둘러도 빠르지 않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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