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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사스와 '의료 영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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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홍콩의 의사들이 '괴질 전선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

괴질 감염자를 치료하다가 감염된 의료진이 급증하는 가운데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50대 후반의 중견 의사가 홍콩 의료인으로선 처음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으로 숨지면서 부터다.

홍콩의 성도일보는 4일 "평소 심장병을 앓았던 류다쥔(劉大鈞.56)이 감기환자 치료 과정에서 사스에 감염돼 13일간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눈을 감았다"고 보도했다. 설상가상으로 의사로 일하는 부인 역시 같은 병에 걸려 격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를 잘 아는 한 의사는 "지난달 하순 종합병원으로 괴질 감염자를 옮긴 뒤에도 '사스는 사소한 질병'이라며 환자를 계속 진찰하다가 이렇게 변을 당했다"며 비통해했다.

홍콩의 의료계는 요즘 사스 노이로제 상태다. 지금까지 발생한 감염자(7백34명) 중 24%인 1백77명이 7곳의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간호사.의대 실습생이다. 초기엔 이 병의 무서움을 잘 몰라 안이하게 대처하다 피해를 보았다.

그후 방역 마스크를 쓰고, 알코올 소독을 하는 등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지만 의료진의 괴질 감염이 여전히 잇따르고 있다.

지난 3일엔 롄허(聯合)병원의 의료진 3명이 또 괴질에 걸렸다.

그 바람에 종합병원에서는 인력과 시설이 모자라 긴급 수술을 제외하곤 일상적인 진찰과 치료활동이 사실상 중단됐다. 사스 환자를 받은 병원의 의료진은 자기도 모르게 이 병에 걸려 가족에게까지 옮길까봐 아예 귀가하지 않는 풍토도 생겨났다. 병원과 근처의 숙소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다.

일부 개인병원에선 고열 증세를 보이는 환자의 진료를 거절하거나 아예 '일시 휴업' 팻말을 내걸었다.

하지만 대부분 의사들은 16겹짜리 두꺼운 마스크에다 1회용 비닐장갑과 두건 등으로 '중무장'을 한 채 환자를 보살피고 있다.

그래서 홍콩인들의 의사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에는 "당신들의 분투는 홍콩의 미래" "거인(巨人)의 그림자를 본다" "우리의 마지막 영웅들"이라는 글이 잇따르고 있다.

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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