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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에 사색…동체착륙에 환성|KAL기 승객 김우황씨의 조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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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기체 내엔 온통 뿌연 연기가>
『오! 하나님….』양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몸을 앞으로 숙인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머리위로 양손을 마주잡고 하나님을 찾았다. 기체가 얼음판 위에 닿는 진동이 한차례 지나가는 순간 동체가 끌리듯 하더니 덜컹 멈춰섰다. 『살았구나. 하나님, 고맙습니다-.』 비행기가 비상착륙을 한 것이다. 「파리」 「오를리」공항을 떠난 후 나는 저녁식사 「서비스」를 받은 후 잠시 눈을 붙였다가 떴다.
창밖이 희끄무레해서 벌써 새벽인가 했더니 말로만 듣던 백야였다.
시계를 보니 21일 새벽 3시45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검은 괴물이 보이는가 하는 순간 불화살같은 것이 날아왔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기체왼쪽에서 안개처럼 밀려 들어왔다. 아마 수백발의 총탄이 날아왔나 보다. 기내 중간쯤에서 「악」하는 비명이 터졌고 사방으로 창유리가 튀었다.
이 순간 기체가 거꾸로 선듯 곤두박질하면서 쏜살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내 고막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 순간은 60초 내지 90초 정도였던 것 같은데 나에게는 20년도 더 되는 듯했다. 통로쪽에 앉아있던 승객들은 굴러 떨어지고 선반 위 물건들이 이리저리 날아 캄캄한 기내는 생지옥 그대로였다.
『아빠, 권총을 사와야 해』하며 떼를 쓰던 아들 형욱(7)의 모습이 떠오르고 둘째 형술(5)과 아내의 모습이 순간 눈앞을 스쳐갔다.
급강하하던 기체가 서서히 고도를 유지하는 것 같다고 느끼자 어처구니없게도 이젠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총격이 있기 얼마 전부터 기체 왼편으로 검은 물체가 지나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틀림없었다. 또 다시 검은 물체가 기체상공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또 괴물이 강렬한 「라이트」를 우리 기체로 쏘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미그」기의 습격이었다.
『죽기 전에 기록을 남기자』는 각오와 함께 갑자기 수첩이 어디 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엉겁결에 비행기표를 넣은 종이 위에 순간 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와 수많은 대화를 나눈 김창규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들과 몇몇 승객들이 나의 기록을 나중에 베껴갔다.
기체 왼쪽의 유리창엔 탄흔이 여기저기 흩어져 희뿌연 구름이 반사되고 있었다.
두 겹으로 알고 있었던 유리창이 실은 세 겹이나 된다. 가장 밖의 유리창엔 콩 만한 탄흔이 나고 중간 유리엔 완두콩 크기, 그리고 가장 안쪽의 유리엔 손바닥만한 탄흔이 보였다.
몇분 전까지 내가 앉아 있었던 22번과 24번열에 탄흔이 집중되어 있었다.
내 자리는 당초 6번열이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 일본인 승객부부가 아기를 데리고 있어 15열로 옮겼지만 바로 그 자리에 어느 「프랑스」여자 승객이 누워 있었기 때문에 바로 문제의 22열에 조금 전까지 앉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코를 심하게 골아 나를 15열로 쫓아준 어느 외국 승객에게 감사할 뿐이다.
24번열의 한국인(방태환씨)과 25번열의(스가노)이 총에 맞아 희생되고 26번열의 한국인은 중상을 입었다.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은 대단히 침착했다.
기내 방송으로 「벨트」를 매라고 긴급 사태에 대처할 지시를 하는가 하면 어느 승무원은 여자 승객에게 「벨트」를 매어 주기도 했다.
탈 때부터 이름을 익혀둔 「스튜어디스」 「미스서」가 왼쪽 비상구를 지켜 달라고 부탁해왔다.
왼쪽으로 옮겨 오른쪽 비상구쪽을 바라보니 KAL국제화물 판매대리인 정철수씨(35)가 벌써 소화기까지 꺼내들고 앉아 있었다.
『승객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같이 하나님을 믿읍시다. 때아닌 외침을 듣고 바라보니 정 대리의 늠름한 모습이 들어온다.
총격 30분 후쯤 기체가 다소 강하하는 듯 하더니 기내방송이 장내에 울렸다. 불시착한다는 것이었다. 『「넥타이」를 풀어 주십시오.』
『만년필이나 열쇠 꾸러미, 선반위의 물건들을 복도로 내려놓기 바랍니다.』
KAL기에서는 승객 모두가 국민학생처럼 고분고분했다.
사무장도 뛰어다니면서 외쳤다.
『우리 비행기는 안전하니까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 구명복을 입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스튜어디스」들이 일제히 뛰어 다니면서 구명복을 입는 것을 도와주고 심지어는 입혀주기까지 했다.
나는 비상착륙 한다는 말을 듣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백야 속에 어스름한 풍경들이 시야를 스쳐가고 있었다. 거무스레하게 수풀이나 삼림지역이 보이는가 하면 하얗게 나타나는 것은 눈 쌓인 「툰드라」지역이거나 호수나 강 위 빙판이다. 이때 「카운트다운」이 있었다. 『하나 둘 셋…』 그러나 비행기는 내려갔다가는 아슬아슬하게 다시 떠오르곤 했다. 왼쪽 날개의 끝 부분이 90cm정도 떨어져나가 너덜거렸다. 「카운트다운」이 하나씩 하나씩 시작될 때마다 승객들은 명령에 따라 고개를 푹 숙이고 손으로 발목을 잡고 엎드리는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비행하기를 무려 1시간 30여분.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하나, 둘, 셋…눈을 딱 감았다. 죽음과 마지막 대결하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정신이 맑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꿍꿍 세번 「바운드」하면서 기체가 밀려 나갔다.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멎었다. 마지막 순간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창 밖으로 뿌연 눈가루를 휘날리면서 호수 가운데로부터 가장자리로 밀고 나간 기체가 멎은 곳은 언덕 앞이었다. 나무 하나를 치고 나갔지만 거대한 전나무의 바로 앞에서 멎었다. 모두가 울었다. 만세를 정신없이 불렀다. 기체는 왼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진 채 착륙에 성공했다.
기체의 반이 땅에 걸쳐 있었다. 모두가 살았다. 모두가 줄줄 눈물을 흘렸다. 마치 공항에 내린 듯 KAL기는 총탄으로 만신창이가 된 기체를 가뿐하게 호수의 빙판에 내렸던 것이다. 나는 『김 기장님, 나오세요』라고 외쳤다. 그는 은인이었다. 그의 모습이 나타나자 기내는 환희의 울음바다로 화했다.
승객들은 기장과 승무원들을 얼싸안고 살려줘서 고맙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기장 김창규씨는 『온힘을 다해 조종간을 잡았더니 두 팔이 뻐근하다』고 했다.
2시간 반쯤 기내에 갇혀 있었다. 갑자기 소련군 장갑차가 나타나고 무장군인 30여명이 비행기를 에워쌌다. 그중 10여명이 기내로 올라와 우리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밖에 나가보니 우리 비행기는 호수빙판과 언덕에 반쯤 걸쳐 있었으며 동체왼쪽 중간쯤에 2백여발의 총탄을 맞은 듯 내 팔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나 있었고 왼쪽날개는 너덜거려 못쓰게 되어 있었다.
얼마 후 「헬리콥터」 1대가 날아와 먼저 부상자와 여자·어린이들을 실어갔고 이어 2대가 날아와 우리를 데려갔다. 일본인 「스가노」씨는 관통상을 입고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는 「헬리콥터」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우리는 「헬」기로 1시간 날아가 들판에 내렸으며 다시 「버스」에 옮겨 타고 50분쯤 달려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학교 같기도 하고 교회당 같기도 한 큰 건물에 수용됐고 부상자와 부녀자는 병원에 수용됐다. 이 마을을 「켐」마을이라고 했다.
소련군은 우리들의 「카메라」와 여권을 거둬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았지만 한국인 승객들은 소련과 국교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휠씬 불안해 했다. 우리가 든 건물주위에는 50명 이상의 무장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폈으며 우리들의 외출은 금지됐다. 마을 사람들이 침구를 날라와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민간인들은 미소도 보이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감자 2개·오이 1쪽·고기 2쪽으로 첫 식사를 했으며 쌀밥·군고기·수수밥·보리밥 등을 번갈아 주었는데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이런 식사를 5번했다.
우리는 이날 저녁 8시30분쯤 공회당 안에서 TV로 KAL기 비상착륙에 대한 「뉴스」를 시청했다. 소련통역은 이곳 신문에도 사진과 기사가 났다고 말해 주었다.
김 기장과 이 항법사는 이날 밤 6시간동안 소련군의 조사를 받고 돌아와 그들이 그렇게 까다롭게 굴지는 않았다고 전해 주었다. 조사 나온 소련 공군소장은 호수에 동체 착륙한 김 기장의 조종술이 1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기적을 이루었다고 감탄했다.

<친절한 주민, 먹을 것 날라줘>
특히 호수가 소련북쪽 「툰드라」지대라고 하지만 해빙기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기체가 빙판 위에 내려질 경우 얼음이 꺼져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김 기장은 거리를 정확하게 재서 앞머리를 육지에 닿게 한 모양이다.
이튿날 상오 우리는 영화 2편을 봤다. 한편은 「레닌」의 혁명과정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은 「아메리컨·인디언」에 관한 것이었다. 소련군은 이날 하오 5시쯤 우리들을 4대의 「버스」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 갔으나 도중에 기상이 나빠 되돌아왔다. 나는 소련당국이 승객들을 석방할 것으로 믿었다. 이날 하오 8시20분 다시 「버스」를 타고 「켐」 마을의 공회당을 떠났다. 이때 마을사람 5백여명이 나와 손을 흔들며 전송해 주었다. 하오 9시 군용인 듯한 작은 비행장에 도착해 대기중인 소련항공기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떠나 하오 11시30분쯤 「무르만스크」 공항에 도착했다. 새로 지은 「무르만스크」 공항 건물은 백색 「콘크리트」와 「알루미늄」 유리로 된 현대식 건물이었다. 「무르만스크」는 세계에서 유일한 북극권 대도시로 인구는 35만명. 거기는 소련북부 함대의 본부가 있다
공항대합실에서 소련주재 미국 영사와 일본 공관직원 2명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하오 11시30분 「로비」에서 가벼운 식사를 한 뒤 23일 새벽 2시15분에 「팬암」 비행기에 올랐다. 소련군은 공항에서 「카메라」와 여권을 돌려주었다. 5분 뒤 이륙한 「팬암」기는 새벽 3시10분 소련 국경을 넘어 「핀란드」에 들어섰다고 우리에게 알렸다.
1시간쯤 날았을까 저아래로 「헬싱키」 시내의 불빛이 보였다. 나는 55시간30분만에 「헬싱키」 공항에 발을 디디면서 새삼스럽게 내 목숨이 살아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나는 죽음 앞에서 본능적으로 기록을 해야된다는 자극을 받았었다. 이는 언제인가 나의 가족에 전달되리라는 희망에서였다. 이제 이 기록은 살아 돌아와 인생의 교훈을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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