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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삼국지 해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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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해제/장정일.김운희.서동훈 지음/김영사, 2만4천원

장정일.김운회.서동훈 공저 '삼국지 해제'(김영사)는 한국인이 쓴 삼국지 해설의 결정판이다.

시인이자 소설가(장정일), 지역학 연구가 출신의 삼국지 매니어(김운희 동양대 교수), 영화.광고 등 문학의 파생상품 쪽에 밝은(서동훈 대구미래대 교수) 공저자 세명은 2003년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독자의 눈으로 중화주의와 권위주의라는 두 가지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다.

공저자들에 따르면 유비.관우.장비.조자룡.제갈량 등이 주도하는 '삼국지'에는 동탁.여포.이유.마등.곽사.가후 같은 비(非)한족 출신들을 폄하하는 문화 제국주의가 숨어 있다.

또 황건적을 비롯한 하층 민중들의 움직임을 '난(亂)'으로, 선에 의해 진압돼야 할 악으로 묘사하는 권위주의 사상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삼국지를 다룬 많은 대중적 해설서 가운데 특기할 만한 의의를 갖는다는 게 내 판단이다.

'천년의 베스트셀러'라는 원전의 인기에 부응해 삼국지 해설서는 알고 보면 실로 방대하다. 여기에는 '삼국지연의의 세계''삼국지 고증학' '소설이 아닌 삼국지'처럼 원전을 분석적으로 자세히 읽자는 해설류의 책이 우선 기억난다.

여기에 '삼국지 인간경영''삼국지 용병학'처럼 원전에서 현실에 적용할 응용 예화(例話.스프링보드 스토리)를 찾자는 해설도 있다.

또 '삼국지 인물사전' '삼국지 문화답사기' '삼국지 역사기행' 같은 항목별 정리작업이 있고, '삼국지 인물론' '수필삼국지' '삼국지 풍류담' 같은 강사(講史) 형식의 에세이가 있으며, '후삼국지' 'SF 삼국지' '21세기 삼국지'처럼 원래의 이야기에 새로운 상상력을 보탠 외전(外傳) 소설이 있다.

여기에 박종화.김동리.김광주.김용제.김동성.이문열.김홍신.이재운 등 소설가들이 내놓은 평역(評譯) 소설 등을 더한다면 '삼국지 담론'에 속하는 서적들로 도서관을 만들 수 있지않나 싶다.

'삼국지 해제'의 의의는 이 같은 삼국지 담론을 40대 초반인 공저자들의 세대 감각 아래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기존의 삼국지에 결여됐던 주변부 문화권과 기층 민중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이 같은 정치의식은 지난해 선거에서 표출됐듯이 냉전시대에 형성된 불평등을 제거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의 합리주의를 정립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욕망에 맞닿아 있다.

그러나 '삼국지 해제'는 역사적 분석에 치우친 나머지 '삼국지'라는 소설이 애독되는 문학적 이유를 밝히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삼국지'는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를 천시했던 봉건 사회의 사대부들조차 좋아했던 소설이다. 장학성(章學誠) 같은 청대 유학자들은 많은 역사적 사실을 배우면서 동시에 허구를 통해 인생의 숨겨진 의미를 탐구할 수 있는 '삼국지'의 효용을 언급했다.

유럽 중국학의 태두였던 앙리 마스페로는 "모든 중국인이 읽었고, 중국이 존속하는 한 읽을 유일한 소설"이라고 '삼국지'를 정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삼국지'의 영광은 그것의 세계관이 아니라 스토리 밸류, 즉 이야기로서의 가치에서 생겨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삼국지'' 같은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해답을 주는, '문학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로서 '삼국지'를 읽는다.

나관중의 '삼국지'는 "한(漢)나라를 구하려는 주인공들(유비.관우.장비.공명)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하는 절대적인 적(하늘의 뜻)에 맞서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마침내 패배한다"는 강렬한 이야기의 운명 비극이다.

나름대로 타당한 대의를 위해 분투하는 주인공들은 어떤 이야기에서도 볼 수 없는, 핍진한 인간 형상의 적대자.조력자.구원자를 만나면서 굵직굵직한 플롯들을 짜나간다.

첫 대목부터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야기는 유비의 출세와 촉한의 건국, 허무한 패망으로 독자를 울리고 웃긴다.

관우.장비와 유비가 차례로 죽어가는 이야기가 워낙 가슴아프고 극적이어서 이야기가 모두 끝난 줄 알았던 독자들은 남은 잿더미로부터 다시 일어나는 마력과도 같은 불길에 놀란다.

그것은 바로 공명의 분투며 이 분투는 출사표와 공명의 죽음에 이르러 최고의 절정에 달하면서 한없는 눈물을 쏟게 만든다. '민중'의 좌절은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공명처럼 비범하고 고결한 인물이 가치있는 행동을 하다가 좌절할 때 우리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제각기 자신이 원하는 어떤 모범과 의미들을 찾고 인생과 세계에 대한 반성을 경험한다.

이것이 '삼국지'와 같은 위대한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힘이다. 이처럼 솔직하고도 힘있는 이야기가 없이 문명은 진보해 나갈 수가 없다. '삼국지 해제'를 계기로 이 같은 동양 고전들의 문학적 가치가 다시금 환기된다면 좋겠다.

이인화 (소설가.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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