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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暗香 혹은 낭만에 대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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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 근원(近園) 김용준의'근원 수필'(열화당, 2001년 재출간)을 읽다가 '암향(暗香)'이란 낱말과 마주친 뒤 잠시 숨을 죽여야 했다. 길섶 한편에 숨어 핀 꽃 하나를 발견한 듯한 신선함 때문이다.

'어디인지 모르게 풍겨나는 그윽한 향기' 암향은 옛 사람들을 매료시켜온 어휘인데, 그게 '근원 수필' 전체 분위기이기도 하다. 거기 실린 '두꺼비 연적(硯滴)을 산 이야기'를 읽으며 근원이란 사람을 가늠해보자.

한 단골 가게를 들른 근원은 순간 뻑 간다. 두꺼비 모양 연적 한 점 때문이다. 외상 긋고 챙켜들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 집에서 부인 바가지에 치도곤을 당했다.

"쌀 한 됫박 없는 판에 두꺼비가 우릴 먹여 살려요?" 당시 그는 서울미대 학장. 그러나 없이 살던 해방 직후 무렵이 아니던가. 소동 뒤에도 근원은 밤잠을 설친다. "두꺼비는 내 문갑 위에서 잠을 잔다. 나는 자다말고 번쩍 일어나 불을 켠 뒤 사랑하는 두꺼비를 살핀 뒤에야 다시 눈을 붙이기 일쑤다."(49쪽)

못말리는 여유다. 그러한 낭만과 집착의 사이, 아취(雅趣)와 집착 사이는 생각보다 촌수가 가깝다. 얼마 전 소개했던 '문방청완(文房淸玩)'의 권도홍(71)씨만 해도 그렇다.

신문기자 시절인 1960년대부터 벼루.먹 등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컬렉션해온 그 분은 지금까지 주택부금 등 적금 만기를 제대로 채워본 일이 없다. 좋은 벼루를 만나 눈이 멀 때마다 부인이 부어온 통장을 냉큼 헐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물건이란 그걸 좋아하는 이에게로 모인다(物取於所好)했던가. 명품 2백여점이라는 벼루 사랑과 먹 수집(硯癖墨痴)덕에 우리는 암향 은근한 또 한권의 책 '문방청완'을 만나게 됐으니….

만년필과 PC 등 박래(舶來) 필기구에 밀린 문방사우에 관한 그 책은 중앙일보 지면에서만 소개됐다.

"요즘 세월 누가 관심이나 있겠어. 당신에게만 한 권을 보내네." 그게 저자의 말이었다. 하지만 별나다. 기사가 나간 뒤 미주 동포독자들을 포함한 수십통의 e-메일.전화가 이어졌으니 말이다.

이 책의 늠름함은 중국 문헌을 포함한 충실한 전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에 의혹이 있다 싶으면 가차없다. 이런 식이다.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 먹을 한 수 아래로 치는 대목이 비친다.

"평안도 맹산 먹은 먹빛이 흐리고 모래가 섞여 있다." 저자의 반박이 이렇다. "명나라 동기창의 시에 '호구차를 끓이며 고려 먹을 간다'는 귀절이 있다. 동기창이 누구인가. 천하의 동기창이 과연 모래 섞인 고려 먹을 갈 것인가? 서긍이 봤다는 고려 먹은 하품(下品)일시 분명하다."(1백41쪽)

기자는 그때 리뷰에서 이렇게 평했다. '문방청완'등장은 문화사의 빈칸을 메운 가치가 인정된다고. 사실이다. 조선조 이래로 문방사우 기록물이 희귀하기 때문이다. 도자기.서화 등에 밀려 컬렉션 자체가 드문 벼루 등이 산실되지 않은 것 만해도 어디인가.

고가(10만원)의 책 대신 대중교양서 버전이 기회에 함께 나왔으면 하는 소망은 그 때문이다. 부박해진 요즘 옛 시대 암향을 함께 즐기자는 제안이다. 전쟁이다, 경기침체다 해서 어수선할수록 더욱 그렇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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