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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작은 세월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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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나현철
경제부문 차장

1. 화재 등 비상상황을 먼저 상황실과 소방담당자에게 통보한다.

2. 안내데스크 담당자에게 대피방송을 하도록 지시한다.

3. 소화기와 소화전으로 신속히 화재를 진압한다.

4. 박물관 건물과 전시된 예술품의 보험 관련 업무를 처리한다.

 하루 1000여 명의 학생이 찾는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이 최근까지 운영해온 ‘비상사태 대응 매뉴얼’이다. 외부에서 파견된 용역직원 8명과 함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정규직 직원 2명이 화재 등 재난 상황에서 취해야 할 행동을 순서대로 정해 뒀다.

 언뜻 봐도 나사가 여러 개 빠져 있다. 인명이 위협받는 급박한 상황이라도 일단 내부 보고가 우선이다. 119 같은 외부기관에 먼저 구조나 화재진압을 요청할 재량권이 담당자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골든타임’을 낭비하고, 재난을 키울 수 있는 요인이다. 뒤집히기 시작한 세월호 승무원들이 가장 먼저 연락한 곳은 해경이 아니라 제주관제소였다.

 ‘관람객 안전이 최우선’이란 인식도 보이지 않는다. 매뉴얼이 정규직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건 ‘외부에서 파견된 안내직원에게 대피방송을 하도록 지시하라’는 것뿐이다. 이런 매뉴얼대로라면 혹시 불이라도 날 경우 관람객들은 알아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사후처리도 문제다. 관람객의 대피 상황이 아니라, 훼손된 시설이나 그림의 보험금을 챙기는 게 관리자에게 주어진 몫이다.

 한은만 이런 건 아닐 것이다. ‘빨리빨리’로 상징되는 압축성장 과정에서 우리 사회엔 ‘사람보다 돈’ ‘고객보다 회사’라는 생각이 폭넓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런 가치전도가 세월호 참사를 불러왔다. 한은 관계자는 “이전 매뉴얼엔 인명 경시와 우리끼리 잘하면 된다는 개발시대의 논리가 짙게 배어 있었다”며 “우리 내부에 있던 잠재적인 세월호”라고 말했다.

 한은이 이달 마련한 매뉴얼은 확 달라졌다. ‘사람과 고객이 최우선’이라는 점이 명시됐다. 직원들이 관람객 안전을 위해 모든 조치를 다한 뒤 보고하도록 했다. 직원들이 어디서 뭘 해야 하는지도 새로이 규정했다. 훈련도 강화했다. 1년에 한 번 ‘을지연습’ 때 정규직만 하던 걸 파견직원까지 포함해 보다 자주 하기로 했다. 재난 상황을 가정해 소소한 시설도 개선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열쇠를 찾으러 허둥대지 않게끔 비상문의 출입구 자물쇠를 키패드로 바꾸는 것 같은 일이다.

 이런 곳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위에서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찾고 바꾸는 곳들 말이다. 세월호 참사 뒤 반성하고 바꾸겠다는 다짐이 곳곳에서 들린다. 국가개조라는 거대 담론이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변화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 내부에 ‘작은 세월호’가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기관과 기업이 많을수록 대한민국이 더 안전해질 것이다.

나현철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