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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서 더 유명한 탈북시인 장진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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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북한 전문 인터넷 신문 ‘뉴포커스’의 서울 논현동 사무실에 펼쳐진 평양 위성사진 위에 누운 장진성 시인. 노트는 그가 탈북할 때 가져온 시작(詩作) 노트. [중앙포토]

그를 만나러 갈 때만 해도 뉴스란 확신은 덜했다. 영국 의회에서 탈북자가 증언하는 게 처음은 아니어서다. 그럼에도 길을 나선 건 장소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1097년 건립된 웨스트민스터홀을 가로지를 수 있어서다. 이달 초 영국 의회의 ‘룸 4A’로 향하는 마음이 그랬다.

 그와 의원·전문가들과의 90여 분 대화를 지켜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내내 각별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엔 그의 영문 책 『Dear Leader(친애하는 지도자)』가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나의 작가’로 불린 북한의 선전 문필가였다가 북한의 실상에 눈을 떠 2004년 탈북해 서울로 오기까지 경험이 담긴 일종의 수기였다.

 행사 후에도 그의 주변에서 사람들이 줄어들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이젠 말을 걸어도 되나 싶었는데 매니저 격인 인사가 “지금은 안 된다”고 제지했다. 과연 기자인 듯한 이가 카메라와 녹음기를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행사 전에도 “CNN과 인터뷰 중”이란 말을 들었다.

 다음 날 오전에야 어렵사리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탈북 시인 장진성(43)이다. 그는 근래 외국에서 더 주목받는 듯하다. 최근 미국 NBC·CNN과 영국 BBC에 출연했고, 일간지 더타임스·파이낸셜타임스·가디언·USA투데이,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그의 책 또는 사연이 다뤄졌다. 서울로 돌아갔나 싶었는데 뉴질랜드에 있다고 하질 않나, 곧 동남아에도 간다고 했다. 9월엔 북미 북 투어에도 나선다고 했다. 영문판 발간이 계기였다. 그 스스론 “책으로 인해 희한한 일이 생긴다”고 했다.

영국 더타임스의 주간 잡지 ‘매거진’ 5월 3일자 커버스토리에 등장한 탈북 시인 장진성씨.

 - 서구의 관심이 남다르다.

 “(한국어 책일 때와는) 차원이 다르긴 하더라. 문화에의 설득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느낀 건데 인권 선진국일수록 문화 선진국이란 거다. 저는 정치가 아닌 문화로 말하고 설득하려고 했다.”

 그가 말한 ‘런던 올림픽 때’는 당시 열린 세계 시인대회를 가리킨다. 204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참가했는데 그는 북한 대표였다. 서구에선 그가 북한의 선전 문필가 출신이란 사실에 주목했다. 실제론 남한에서도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한글판 2008년, 영문판 2010년)를 냈으니 ‘남한 시인’이기도 했다.

 - 이 같은 반응을 예상했나.

 “못했다. 랜덤하우스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 언론사에 책을 한 권씩 보냈는데 그걸 보고 연락했다고들 하더라.”

 서구의 서평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더타임스 일요판엔 그가 표지인물이었다. 더타임스는 “(그의 책은) 독자들을 지구상 가장 무시무시한 곳으로 데려간다. 역사적 문헌으로도 아주 중요한 책이며, 즉각 고전이랄 만하다”고 했다. “장차 역사가들이나 그의 책이 얼마나 새로운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내용의 진실성에 대해선 유보적 평가를 했던 파이낸셜타임스도 “북한에 대한 폭로야말로 이 책이 주는 중대한 점”이라고 했다.

 - 영문판을 내게 된 계기는.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시집을 보고 에이전트들이 찾아왔다. 그중 한 명과 2012년 말 계약했다. 이듬해 책을 써달라고 해서 수기를 썼다. 그게 영국의 랜덤하우스와 계약이 됐다. 미국 출판사와도 별도 계약을 하는데 11곳이 경매를 했다고 들었다.”

 10만 달러에서 출발한 계약금이 이 과정에서 치솟았던 모양이다. 그의 에이전트는 “꽤 큰(great) 6자리 숫자”라고 했다. 100만 달러에 육박한 듯했다.

 - 책을 본 편집자의 첫 반응은 어떠했나.

 “울었다고 하더라. 북한의 이런 현실을 여태까지 왜 누구도 말하지 않았느냐, 21세기인데 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었느냐고 했다더라.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 나온 건 증언을 토대로 외국인들이 쓴 것이었다. 그러니 구체적 감정 묘사가 아무래도….”

 - 한국에선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데.

 “워낙 북한 문제에 관심이 없으니까. 탈북 문학이라고 하면 경원시한다. 이번을 계기로 북한에서 오신 분들이 탈북 문학을 국제화할 수 있도록 글을 많이 쓰면 좋을 것 같다.”

 - 남한에선 작품 활동이 활발하진 않았다. 이번 일로 본업이 작가란 느낌이 들었겠다.

 “그렇다. 결국 어떤 호소보다 진실에의 호소, 사람에의 호소가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출판사에서 두 번째 작품을 다시 요구하고 있다. 이제 길이 열렸기 때문에….”

 - 어떤 작품인가.

 “탈북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책을 쓰고 싶다. 성이란 게 가장 본능적인 것이고 왜곡될 수 없고 왜곡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 않나. 인간의 마지막 본능마저 왜곡되는, 성을 통해 북한의 현실을 얘기하고 싶고 인권을 얘기하고 싶다.”

 - 문학을 통해 때론 해원(解<51A4>)하기도 한다.

 “그렇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우리 한국에 좋은 작가가 많다. 유명한 작가도 많다. 이상한 건 북한 인권을 얘기하면 정치적이라고 하는 거다. 그러나 당연한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거다. 북한 인권을 외국 작가나 외국 기자들이 다룬다. 왜 한국 작가가 놓치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유명한 작가들이 탈북자와 한마음이 돼 글을 쓰게 된다면 더 좋은 책들이 나올 텐데….”

 - 2004년 탈북했으니 남한에 온 지 10년이다.

 “열 살이다. 미성년자다. 왜 열 살이냐면 내가 살았던 북한 30년 세월 속 세상엔 언론도 인터넷도 없었다. 그때의 내 삶은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 그 미래만 있는 삶이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한국에 와서 느낀 건 내 삶이 풍부해지고 다양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놀랍고 또 그것에 감사한다.”

 - 더불어 괴로움도 많아졌을 텐데.

 “괴로움도 다양성(의 일부)이다.”

 그는 “내가 모르는 체제, 처음 보는 체제여서 남들이 하나를 느낀다면 나는 흥분해서 10개를 느낀다. 새로움이 주는 영감 그런 게 결국 나를 다시 작가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북한 뉴스 코너 만든 가디언

서구에선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다. 상상 이상이다. 특히 BBC의 관심은 남달라 수시로 북한을 취재한다. 최근엔 BBC에서 한국어 방송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근원을 따지고 보면 북한을 의식한 것이다. 장진성 시인이 의회에서 “북한 사람들도 시장이 활발해진 덕분에 외부 정보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됐다. BBC가 대북 방송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그 다음 주 의회에선 BBC 한국어 방송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논의가 있었다.

 여기에 가디언도 홈페이지에 아예 북한 뉴스 코너를 열었다.

 이 같은 ‘북한 열기’에 대해 미국 ‘NK뉴스’ 설립자 채드 오캐럴은 “솔직히 김정은 등장과 맞물린 현상”이라며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는 일상생활에 대한 것이다. 심지어 장례식이 어떻게 치러지는지도 궁금해한다”고 전했다. 알려진 게 거의 없는 ‘은둔의 왕국’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한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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