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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공생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지난 10월. 「마리·벨」이란 영국의 한 처녀가 개방식 형무소에서 탈주했다. 개방식 형무소는 불원 가석방이 확실한 죄수들만을 수용한다. 따라서 간수도 없이 사회 복귀를 위한 준비를 받는 곳이다. 「마리」가 여기를 탈주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왜? 3일 후에 잡혀 돌아온 「마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미 정상인이며 사회에 나가도 아무 해가 없다는 것을 확인 받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11세 때 아무 까닭 없이 3세와 4세의 두 어린애를 차례로 목 졸라 죽였었다. 이미 찍힌 낙인은 「선천성 흉악범」이라는 것이었다.
「마리』의 자유의 도피행이 있은지 2주일 후에 12세 소년이 4세 어린애를 죽인 사건이 또 일어났다.
뭣이 잘못이었을까? 선천적 흉악성일까, 아니면 교육에 뇌임이 있을까?
결국 마리와 12세 소년 모두 감금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인간이라도 내일에의 포망을 박탈 당할 수는 없다.
「마리」는 처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 만약에 그녀가 고아였다면? 얘기는 간단했다. 누구나 환경의 탓으로 돌렸을 테니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고아란 빈곤과 범죄의 길과 직결되어 있다. 고아를 보는 두 사회의 차가운 눈이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울타리 없는 감옥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부터 꼭 50년 전 목포의 유달산 기슭 해변가에는 이런 고아들만을 수용해서 직업을 가르친 거지 대장이 있었다.
사찰관이었던 그는 자칫하면 악에 물들기 쉬운 고아들을 한명이라도 더 바르게 키워 나가려고 몰골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6·25때 납치된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유업은 그 오른팔이 되어오던 일인아내 윤 학자 여사가 이어 나갔다.
그후 32년. 그 동안 윤 여사가 길러낸 고아는 근 3천명이나 되었다. 개중에는 최고학부를 마치고 박사가 되어 사회의 중견 일꾼으로 활약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앉다.
그러나 끝내 그녀는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다. 병명은 「조기 노쇠」. 고아 사업은 신앙과 정력만으로는 안 된다는게 여사가 쓰러진 다음에 남긴 말이었다.
새싹회가 마련한 올해 소파상은 목포 공생원에 돌아갔다. 3대째로 내려가는 고아 사업 단체다.
이제는 조금도 외롭지가 않다. 고아들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당국의 후원도 활발해졌다. 「고아의 어머니가 목포에서 벌였던 직업 훈련 교육의 성과가 인정되어 작년부터는 서울의 국립 직업 보도 기관도 위임 운영하고 있다.
목포시 호남동의 한 모퉁이에서 뿌렸던 씨에서 싹이 나고, 그게 이제 제법 열매를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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