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니안」의 한국인 고혼…33년의 방황을 끝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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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티니안=정천수 특파원】제2차 세계대전 말「사이만」과「티니안」섬의 밀림 속에서 외로이 숨져 간 5천명의 무명 영령들이 13일 33년간의 긴 방황을 끝냈다. 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자 위령 사업회(회장 이용택·한국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회장)는 이날 상오「티니안」묘지공원에서 이들을 위한「평화기원 한국인 위령비」를 제막, 남의 전쟁에 끌려가 밀림 속에서 통곡하던 영 현들을 뒤늦게나마 위로했다.
이자성 도선사 주지의 집 례로 거행된 제막식에는 한국사회사업 대 설립자 이영식 목사 (83)와「티니안」시장「필리페·C·멘디올라」씨,「조세·R·크루즈」상원의원, 생존교포최몽룡·전경운 씨 등 현지 관·민과 한국 총영사관직원, 2세 교포 등 5백여 명이 참석했다.
지난 5월15일 이들의 유해를 현지로부터「망향의 동산」에 봉환 한 바 있는 이용택 회장은『한 세대가 지나도록 선 조들의 행방조차 모르고 있었던 우리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2차대전의 최대 격전지였던 이곳이 평화의 본고장으로 사랑의 출발점이 되어지기를 합장했다.
일제 때 강제로 징병 또는 징용으로 끌려가 희생된 고혼들이 고국에 돌아오고 이들을 위한 위령비가 제막되게 된 것은 한국사회사업대학 이사장 이영식 목사의 끈질긴 노력의 결실. 이 목사는 75년 후원재단인「괌」도 국제문화「센터」가 추진하는 태평양지역 심신장애 아 특수교육기관 설치관계로 현지를 여행했었다.
「사이판」에서 5.8km 떨어진「티니안」섬(남북20km·동서10km) 에 들른 이씨는 우연한 기회에 징용으로 끌려왔다는 전경달 씨(63·평북 정주출신) 등 교포 4명을 만났다.
그들은 이 목사에게 전쟁 때 죽은 한국인무덤이「티니안」섬 어딘가에 있다고 전했다.
76년 10월 다시「티니안」을 찾은 이 목사는「멘디올라」시장을 만났을 때『이 지역에서 희생된 5천여 명의 한국인을 위해 위령탑이라도 세워야 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무덤의 위치는 아무도 몰랐다.
마침 우연히 사냥을 갔다가 한국 인묘 같은 것을 보았다는「티니안」상원의원「보르하」씨와 교포들과「팀」을 짜「티니안」밀림 속을 뒤지기 3일만에「조선인지 묘」라는 비석을 찾아냈다. 뒷면에는「서기 일천구백사십육년 오월 이십팔일「오끼나와」현 인동지회·미군정부 건립」이라고 씌어 있었다. 묘비 주변엔「콘크리트」뚜껑이 덮인 3개의 유골 함이 있었다.
귀국한 이 목사는 장남인 한국사회사업대학 장 이태영 씨를 현지에 보내 세부적인 봉환 사업을 추진케 했다. 지난 3월23일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추진위원들은 현지에 30년도 더 된 세월동안 외롭게 묻혀 있던 유골을 옮겨 파는 작업을 손수 벌인 후「망향의 동산」장미묘역에 이들의「죽을 자리」를 마련했으며 1천5백 만원을 들여 위령비를 건립한 것.
5천여 명의 한국인 유해가 안치됐던「티니안」섬은 태평양전쟁 때「사이판」과 함께 최대의 격전지.
「사이판」남쪽 5.8km에 위치,「괌」을 공략한 미군이 북상하면서「사이판」공격에 앞서 큰 싸움을 벌인 곳이「티니안」전투. 일본도「사이판」의 전초기지로「티니안」에 1만여 명의 군대를 대량 집결시켜 전투는 치열했고 섬이란 입지조건 때문에 대부분이 전사했다.
당시 일본이 총알받이로 배치한 1만여 명의 군대와 노무자 중 절반이상이 한국인이었고 그 모두가 희생됐다는 것이 생존자 전씨의 증언이다.
현재 인구는 8백여 명. 이 가운데 생존자 3명과 2세 1백50명, 3세 1백50명이 살고 있고 동포들의 처가까지 합치면 인척은 약5백명, 전 인구의 60%가량 된다.
유해 봉환이 있기까지는 교포들이 한국인계라는 것을 숨기고 살았지만 이제는 떳떳이 자랑하며 해마다 위령제를 올릴 것은 물론 부근 다른 섬에도 한국인유해가 있지 않나 찾아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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