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랑하는 2천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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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30년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그것을 「하트·머니」라고 불렀다. 직역하면 「뜨거운 돈」이라는 뜻.
필경 너무 뜨거워 한 사람의 손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는 속성을 풍자한 말 같다.
바로 「루스벨트」가 재임했던 1930년대는 국제 정세가 미묘한 가운데 구미 여러 나라의 경제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따라서 떠돌이 자본 (부동적 단기 자본)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를 찾아 도피 행각을 나서야했다.
이런 자본 도피 현상은 외환 시장을 어지럽히고 화폐 가치에 대한 심리적인 신뢰감을 감소시킨다.
결국 중앙 은행은 환 절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이런 결과는 자본 도피를 더욱 부채질하고 만다.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자본 시장의 입장에선 「하트·머니」는 균형을 깨는 무뢰한이며, 그 「하트·머니」를 취득하는 쪽에선 언제 그것이 밀물처럼 빠져 나갈지 모르는 불안은 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하트·머니」 현상은 국제 자본 시장 아닌 국내 시장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이른바 우리의 부동 자금이 바로 그런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이런 돈이 적어도 2천억원이나 굴러 다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통화량 2조3백50억원의 10% 가까운 액수다. 부동 자본의 비중이 그만큼 큰 나라도 없다.
모든 자본은 「생산적 이익」을 동반할 때 비로소 건전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확대 재생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은 마치 우리 몸의 피가 심장을 통과해야 하듯이 기업을 통해서 순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가 불안한 사회에선 그 돈이 심장을 거치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겉돌게 된다. 우리의 경우는 은행의 요구불 예금 창구·단자 회사·투기자·부동산 등으로 배회하는 것 같다. 한 때 이 돈은 「아파트」 투기에 쏟아져 어이 없는 「아파트·붐」의 신화도 남겼었다.
요즘은 그 돈이 증권시장을 휩쓸고 있는 모양이다. 지난 8일엔 1천억원의 돈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증권 사상 최고의 날」을 기록하기도 했다. 따라서 주가도 증권 사상 처음으로 그 종합 지수가 500을 돌파, 한 때의 「아파트」 시세처럼 폭등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하트·머니」는 뜨거운 것이 지나쳐 마치 불길을 보는 것 같다. 문제는 이 돈이 부랑자 모양으로 「우산」 아닌 무위도식을 일삼는데에 있다. 「인플레이션」 현상만 없다면 당연히 제도 금융에 흡수되어 생산의 역군이 될 돈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안의 심층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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