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7)바둑에 살다(5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조선기원이 발족 되어 제1회 전국 선수권대회를 가졌고 그래서 본래의 목적대로 바둑보급에 주력할 수 있었는데 아직도 치러야 할 시련이 남았는지, 발족한지 불과 1년여만에 여기서 또 자리를 뗘야하게 되었다.
궁 전체가 어느 개인의 소유로·보도되었기 때문이었다. 뜻밖의 명도령으로 당황한 우리는 매일 임원회를 열어 얼굴을 맞대고 궁리를 거듭했지만 당장에 묘안이 나오질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낮 간지러운 대책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집을 산 사람에게 이전비를 받자는 것으로 이 같은 일방적인 요구를 만강일치로 결정했던 것이다. 단골 손님으로 열성가였던 홍종선1급(당시5급)이 선뜻 맡아준 교섭이 주효하여 집주인될 사람에게서 돈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래서 우선 한숨 들리고 나니 이제는 갈곳이 아득했다. 아무데나 우선 구해놓고 보자고 두루 돌아다녔지만 이때만큼은 서울 장안이 너무나도 좁아 막다른 골목 안에서 한숨만 쉬며 지내야 했다. 어디다가 기원간판만이라도 걸건가 초조한 속에서 허송 세윌만 보냈던 것이다.
「어둠에서 만난 초롱불」 이란 말이 지나치지 않을 만큼 고마운 일이 우연히 생겼다. 원남동에서 여관을 경영하는 이신호씨가 방 두개를 임시지만 무료로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단 이 대회가 열리고 그 결과「부득이」 란 자위의 수식과「임시천」이라는 허세를 부리며 앉은자리에서 곧장 여관방인 「나그네기원」으로 이전하였다. 당시 기원은 2개소밖에 없었다. 경성기원과 조선기원인데 하나는 안국동에서 까딱 않고 잘 꾸러나간 대신, 하나는 유전배회로 허덕여야했는데 좁고 교통마저 불편 한데다가 여관방이란 데서 단골손님이 줄어들지 않을까 큰 걱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차리고 보니 그때기우는 지금보다 석이 더 진해서 그랬던지 여전한 성황으로 여관의 만방까지 차지해 남의 영업에 손해를 입힌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원남동 여관 기원이 그래도 바둑보급의 효과는 있었던지 인근의「팬」들을 많이 모을 수 D있었고 따라서 그 후의 임원개편 때는 그곳 유지가 많이 뽑혀 활동이 자못 눈부셨다. 어쨌든 잠시도 중단 않고 조선기원의 명맥을 이어간 것은 이신연씨의 공로가 바탕이었다.
여관기원 2개월의 생활도 정들고 신세만 진 채 페막 할 때가 왔다. 앞서 받아 두었던 사동궁의 이전비를 가지고 명동 천주교회 앞 저동골목 어귀에 적산인 왈식 2충 가옥을 권리금만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래층 비좁은 곳이 나의 숙소겸 살림방이었고 2총 7평 짜리 「다다미」 방이 바로 기원 대국실이었다. 그 곳에 남산때부터 짊어지고 다니던 바둑만을 열 네판 벌여놓았다.
그때까지 무료제공만 받던 더부살이가 협소하나마 기원전용의 버젓한 건물로 안정 되고 보니 유낭기원4년의 고생이 보람을 가져온 듯 우선 용기 백배였다.
날로 증가하는 기객의 접대도 사범과 조교수만으로는 감내키 어려워 사무원 겸 총무를 두기로 하고 초대에 윤숙 초단(당시1급)에게 이 바쁜 일을 맡겼다.
이리하여 윤씨는 초대총무로서6·25전까지 계속 유임했고 또 환두우에도 한국기원의 4대츱를 맡아 활약했다.
저동에 기원 건물을 확보한 뒤부터 바둑보급활동은본븐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유낭기원 4년 간에 사귄 「팬」 에다 명동을 무대로 출입하는 단골손님,. 또 기원자체의 건물이 생겼다 하여 기방에서까지 찾아와 주는 손님도 제법 많아 바둑판 열네 판으로는 항상 기다리는 손님이 붐빌 정도였다. 그래서 어쩌다가 찾아오는 홍일점 강남수양은 남자 손님을 피해 특별히 아래층 나의 살림방에서 달랑 둘이 마주앉은 지도 내국을 했는데, 같은 나이 또래인 젊은 아내가 낮도 구기지 앉고 다대접을 깍듯이 했으니 가위 직업인의 아내였던 셈인가?
강 양은 어느덧 9급의 공식급으로 승급대회의 홍일점이었고 또 그 후에는 5급으로 승급해서 남자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됐는데 얼마 안되어 방납정난가 되었다 한다. 이미 결혼하여 처자까지 있는 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바둑을 위해 부고가사 하겠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으니 이것도 팔자소관인가 싶다. 나의 청춘을 바둑에 불살라버린 탓으로 이제는 아내로부터 당시를 회상하며 꾸중을 들어도 할말이 없게 되어버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