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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새농민과학상』 윤여창씨 성공사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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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풀 한 포기 젖 한 방울의 무게에 대한 소수점이하의 수치까지 계산해 가면서 젖소를 길러왔습니다. 물론 이 같은 수치를 10년간 일지에 적어서 「그래프」를 만들어 이를 중심으로 축산기술도 개량해왔지요….』
77년도 「새농민과학상」수상자 윤여창씨(43·서울대농대 농업생물학과졸업)의 말이다.
그의 농장은 경기도시흥군의왕면내손리 해발3백50m 모락산 기슭에 있다.
윤씨가 이 곳에 정착한 것은 64년4월. 13년 동안 피땀 흘려 다듬어온 그의 목장은 이제 한 폭의 풍경화나 다름없다.
「이탈리언·라이그라스」목초지 3천평이 푸른 물결답고 젖소 26마리가 오동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즐긴다.
그는 축산으로 1년에 3백만원 가량의 순이익을 올린다는 것.
또 평당 10원씩에 샀던 목장(1만6천8백 평)의 땅값이 이젠 수천원으로 올라 웬만한 재산가가 되기도 했다.
윤씨는 이 같은 수익보다는 농촌계몽과 소득증대를 위한 기술교육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75년도엔 우리 나라 축산부문 농민대표로서 미국의 농무성과 사료곡물협회공동 초청을 받고 미국시찰도 했다.
이에 앞서 지역사회의「새마을지도자」자원지도협회회장·새농민학교교장을 역임, 농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다.
그가 연구한 젖소사육기술은 일본북해도 낙농대학 연구진까지 도입해갔다.
이 같은 보람 위엔 숱한 시련과 고생이 숨겨져 있다.
상록수가 되리라는 입지자체가 상처를 입기도 했다.
7남매의 맏이인 윤씨는 취업을 하거나 미국유학을 거쳐 연구생활을 계속하라는 아버지의 강권을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결국 고민 끝에 거의 빈주먹으로 집을 나와 지금의 목장에 첫 발을 디뎠다.
윤씨는 국립종축장(안양)에 근무했던 친구1명의 구원을 받았다.
돼지 2마리를 국립종축장에서 얻었다.
하루 2∼3평씩 줄곧 개간을 하면서 양돈과 사료작물재배에 힘썼으나 여의치 않았다. 돼지고기는 l근에 50원으로 폭락했다. 돼지새끼를 사가는 사람도 없어 그대로 키워 나가는데 따른 적자가 쌓였다. 개간 2년째까지 고생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3년째인 67년 농협중앙회로부터 2년 거치·3년 상환 조건으로 「홀스타인」계 어미젖소 2마리를 대부 받았다.
젖소에서 하루 평균 20∼30kg씩 나오는 우유를 팔아 목장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또 사육 첫 날부터 젖소에 들어간 사료 값과 우유생산량 등을 분석해왔다.
그리고 이의 ▲개체유지능력 ▲산유 능력 ▲번식력 등 3대 능력지수를 뽑아냈다.
번식력이 약한 암 젖소에는 산후 2개월쯤부터 사료를 줄여서 공급, 비만성불임증을 막아주었다.
암·수컷사이에 능력을 보충시키는 방법으로 우생 번식을 시켜왔다.
목축의 수량은 항상 이윤극대화를 위한 적정 선을 넘기지 않았다.
그는 일본북해도 낙농대학과 기술교환을 추진, 현재 이 대학의 학생 대야황군(20)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
윤씨가 농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의 하나는 새농민학교를 열어 목축기술을 전수해오는 점.
그는 출세하거나 부자가 돼서 떠들썩한 자선사업을 벌이는 길보다는 평생을 두고 농민들에게 영농지식을 일깨워주는 길을 택했다.
이제 젖소의 보급에 주력할 차례다.
우선 목장이 있는 단위조합내의 20개 자연부락에서 중농층 2명씩을 골라 새끼젖소 2마리씩을 기르도록 할 방침이다.
몇 가지 기술만 익히면 종전의 한우사육과 같다는 윤씨의 설명이다.
이처럼 젖소사육이 일반화될 때 우리 나라는 농업부국이 된다는 「비전」을 보였다. 【안양=김남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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