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리오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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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는 본래 「키프로스」의 풍요 신이었다. 「아프로디테」가 모계 사회의 수호신이자 생성의 섭리자라면 「아도니스」는 일종의 식물 신·곡물 신이다. 농경민의 생명인 식용 작물과 곡물은 봄에 자라났다가 가을에 수확되어 겨울 한 철은 죽는다. 그러나 봄이 오면 다시 파릇파릇하게 살아난다. 부활인 셈이다. 그래서 고대 「키프로스」엔 4월이 오면 주신 「아도니스」의 제례가 성대히 거행됐다.
「아도니스」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과 그의 부활을 경축하는 「페스티벌」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그 제례를 주관하는 대제관이 다름 아닌 「키니라스」(Cinyras) 후예.
BC 8세기께 「키프로스」에 이주한 「페니키아」의 부족장이라 했다. 이를테면 정교 일치의 수장이었던 셈이다.
「키프로스」의 역사와 정교 일치는 그 후로도 따로 매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사도 「바울」과 성 「바르나바스」가 기독교를 전파하여 기원 후 5세기에 「키프로스」독립교권이 인정된 후에도 그 풍속엔 변함이 없었다. 「아프로디테」 숭배는 「마리아」 공경으로, 「아도니스」제는 고난 주간과 부활절 행사로 대체되었을 뿐이란 얘기다. 그리고 정교 일치의 제주 「키니라스」의 역할은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키프로스」·「에트나르크」 교구 대주교가 떠맡았다.
그래서 l950년10월 37세의 젊은 「마카리오스」 신부가 대주교로 착좌 하여 「에노시스」 운동의 정치적 지도자로 발돋움했을 때도 사람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연한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에노시스」 운동은 「그리스」와의 합류를 주장하는 「그리스」계 「기프로스」들의 정치적 이념이었다. 「마카리오스」 대주교는 「게오르기·그리바스」 장군과 더불어 반「터키」·반영 무장 단체인 「에오카」에 투신했다.
1959년3월1일 「키프로스」가 독립했을 때, 대주교는 고대의 「키니라스」처럼 정교 일치의 수장이자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의 세속 권력은 처음부터 절름발이였다. 부통령에서부터 말단 행정에 이르기까지 요원의 30%는 반드시 회교도인 「터키」계가 장악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74년엔 「에오카」가 「쿠데타」를 일으켜 「에노시스」를 단숨에 무력으로 관철하려 했다.
그러나 사태는 「터키」의 개인과 「그리스」 군정의 와해로 역전되었다.
재기한 「마카리오스」는 「에오카」와 절연하고 「에노시스」 보다는 독립된 복합 민족국가를 지향했다. 그러나 그 조정을 미처 매듭 짓지 못한 채 현대의 「키니라스」는 심장마비로 급서 했다. 통합의 「심벌」이던 그가 「아도니스」처럼 부활하지 않는 한 「키프로스」의 앞날은 활화산처럼 험난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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