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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된 선생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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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딸깍발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들이 담임선생님께 붙여준 별명이다. 선생님은 가난한 선비의 모습 그 자체였는데 정말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선생님은 학교 근처에서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하고 계셨다. 우리들은 밤늦도록 쏘다니다가 이따금 선생님 자취방에 무작정 찾아갔다. 그 방에는 달랑 책상과 서가, 그리고 식기만이 있었다. 선생님은 달빛과 함께 찾아온 말썽쟁이 녀석들을 동생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셨다. 하루는 그 좁은 방에서 5명이 새우잠을 자다가 깨 보니 한 친구의 얼굴이 책상 아래에 있는 게 아닌가. 그 추억이 떠오를 때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선생님께 배운 국어 지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27년 전의 일인데도 선생님에 관한 기억은 밀물처럼 찾아온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뒤늦게 대학에 입학한 선생님은 고학으로 공부를 했다. 선생님은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학교에 다닐 수 없기에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온갖 자유로운 생활을 했던 여느 학생과는 출발부터 달랐다. 선생님은 4년 동안 전액 장학금을 받은 덕에 대학을 졸업하고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선생님은 고지식한 딸깍발이처럼 바른 길만을 고집했다. 제일 싫어하는 것이 학부모님이 들고 오는 선물이나 촌지였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남다른 철학을 갖고 계셨다. 주입 교육이 판을 칠 때였음에도 우리의 꿈에 관한 글을 적어 자유롭게 발표를 시켰다. 교실 뒤 게시판에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두었다. 이런 활동에서는 이른바 문제아라는 친구들이 엉뚱발랄한 창의력을 쏟아내며 주도를 했다. 학교 성적으로는 열등생이었지만 꿈과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우등생이었던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달라진 모습에 몇 번 놀란 적이 있다. 한번은 학교에서 학예회를 개최하는 날이었다. 대개 학예회는 학생들이 준비를 한 촌극이나 합창 등 여러 공연으로 꾸며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탈춤 복장을 한 선생님들이 우르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딸깍발이 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이 신나게 풍물을 치더니 덩실덩실 탈춤까지 추는 게 아닌가. 입시 교육으로 바쁜 와중에도 흥사단에서 틈틈이 전통 문화를 배워 학생들 앞에서 공연까지 하는 선생님은 더 이상 딸깍발이가 아니라 끼 있는 광대였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광대 선생님을 잊지 않았다.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으니 선생님과 함께 대학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예전 선생님이 가르쳐준 ‘해뜨는 교실’이란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해직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걱정이 돼 찾아뵈었더니 선생님은 책마을이란 서점을 개점하고 있었다. 광대에서 서점 주인으로 변한 선생님이건만 딸깍발이 생활만큼은 여전하셨다. 몇 평도 채 안 되는 서점에는 책과 책장, 그리고 주인이 간신히 서 있을 자리밖에 없었다. 5년간 서점 주인과 해직 교사로 생활을 하다 다행히 교육 현장에 복귀하셨다.

 월급쟁이가 된 우리들은 변함없이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 생활을 접고 산간벽촌으로 전보를 가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름도 생소했던, 전라도와 경상도가 경계를 이루는 산골짜기였다. 그곳의 맑은 공기와 푸른 숲이 선생님과 잘 어울렸음에도 현 세태와 너무나 다른 선택에 우리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님을 뵙기 위해서는 산과 계곡을 따라 몇 시간을 운전해서 들어가야 했다.

 작년 이맘때였다. 선생님 집 마당에서 삼겹살 파티로 회포를 푼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은 읍내로 나갔다. 시골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고 나왔더니 아침부터 장이 서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장터 어딘가로 가시더니 모종을 고르고 계셨다. 고구마·호박·고추·상추·오이 등의 모종을 꼼꼼히 살피는 모습이 다름 아닌 농부의 표정이었다. 그중 몇 개를 봉투에 넣은 선생님은 아침 햇살을 담뿍 담아 환하게 웃으셨다. 몇 해 전부터 선생님은 농사짓기에 푹 빠진 농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선생님이 어떤 변화로 나를 놀라게 할지 자못 궁금해지는 5월이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