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독립군 야사 신일양<제55화>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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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참의부활동중 가장 유명한 것이 당시 총독이었던 재등실을 평북강계군마시탄에서 공격한 사실이다.
싸움 자체는 큰 규모가 아니었으나 그것이 우리 민족과 독립운동계에 적지 않은 용기를 불러 일으켰으며 반대로 일본엔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 사건의 상세한 내용을 살펴볼까 한다.
1924년 5월19일 상오 9시쯤.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는 소대장 참위 한웅권, 오장 이춘화, 일등병 김창균·현성희·이명근·김여하·전창남등이 장창혜의 지휘를 받아 국경순시차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 중류를 통과하는 총독에게 일제 사격을 하였다.
독립군이 잠복한 곳은 만주쪽절벽 바위틈이었다. 이날은 중국경찰까지 동원되어 압록강 주변을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으나「마시탄」 절벽에는 방심하고 경비가 소흘했다.
그러나 독립군의 저격은 배가 지나는 곳이 사격지에서 너무 멀었고 사격이 있자 총독의 배가전속력으로 도망쳐버려 총독을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총독은 살아났지만 재등자신이 3·1운동후 소위 문화정치라는 미명을 걸고 한국통치에 대하여 거짓 자랑만 하고 있었던터라 이 피격은그에게 폭탄적 경고가 됐음은 물론 대내·외에 한국독립군의 활동을 선양한 큰 계기가 되어 우리 독립군사에 특기할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상황을 당시 평북지사는 이렇게 보고했다.
『-대정13년 (1924년) 5월19일상오9시 5분쯤부터 약5분간. 저격장소는 문흥경찰서 관내 강계군고산면남산동마시리대안. 중국측 즙안현 아래 합룡개 약20정 하류 압록강안 무영산 산복임. 그 장소에는 첨부한 도면과 같이 암석이 많고 올라가기 어려운 반면 산상에서는 선박을 내려다 보고 저격하기 가장 좋은지점으로서 저격 장소에서 배까지의 거리는 6백m가 됨.
저격 흉한은 약10명으로 모두가 조선인마적으로 인정됨. 이들은 장총 또는「모젤」권총으로서 약40∼50발 발사한 것으로 인정함. 우리 경비원은 기총28발 「모젤」권총 44발 모두72발을 응사하였음.』
저격 당일 즉 5월19일 상오7시 총독 일행은 모두 60여명이었다. 이들은 몇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만포진을 출발, 전구선은 본선과 2, 3백m의 거리를 두고 경비를 하면서 하항하고 있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독립군의 저격은 거리가 멀어 총독에겐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수행원들에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참의부의 총독습격소식이 퍼지자 만주동포사회는 물론, 상해의 임시정부도 크게 기뻐했으며 독립신문은 이 「뉴스」를 대서특필했다.
이같이 국내·외가 흥분된 속에서 중일관계도 긴장되었다. 일본경찰은 저격 독립군을 잡기위해 「마시탄」부근의 중국 민간인들로부터 정보를 얻으려고 했으나 한국독립군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그 지방인들은 일본경찰에 협조하지 않았다.
또 즙안현 지사까지도 일본에 협조하지 않았으니 일본은 봉천성에 대하여 지사의 파편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재등총독이 독립군의 공격을 받은 뒤 일본은 특히 평북 압록강연안 동포에 대하여 온갖 탄압과 만행을 자행했다. 그 가운데 가장 처참했던 것이 독립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한마을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린 사실이었다.
이 사건은 1924년8월8일평북화창면사암리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해 10월쯤 조선기독연합회위원이었던 「토머스·횹스」가 당시 조선총독부 외사과에 『화배(화배)로 받은 소인(소인)』이란 항의각서를 제출함으로써 밝혀지게 되었다.
이 항의서에 따르면 일본은 집과 함께 마을 주민도 대부분 함께 불속에 몰아 넣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암리의 참상과 같은 사건이 국경일대에서는 한 둘이 아니었다. 국경선 이남에서나 이북에서나 동포의 마을은 일본의 혹독한 탄압으로 고생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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