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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제54화 배재 학당-고종황제가 1886년 하사한 현판의 글씨(53)|3·1운동|<제자·윤성열>윤성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3·1독립운동의「배재」학생대표로는 학당 측에서 김병호(11회) 장별하(12회) 장대찬(13회), 고보 쪽에서는 신봉조(3회) 이병선(3회)등이 주동자 역할을 했다.
고보보다는 학당 측이 각종 전단 제작 및 학생동원 등의 활동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이중화 교사를 중심으로 진행된 배재 학생들의 3·1운동은 학당 기숙사와 정동 제일예배당을 비밀「아지트」로 삼았다.
1919년2월8일 반일 항쟁의 첫 포문을 열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은 이미 본국의 각 학교 학생들에게도 연락이 돼있었다. 이 같은 낌새를 알아챈 조선총독부는 서울시내 각 사립학교에 배치된 일인 교사들을 소집, 철저한 감시를 지령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일경의 날카로운 감시망 속에서도 동경 유학생들에게 보내는 위문금을 맹렬히 모금했고 각종 전단을 만들어 각 학교에 배부했다. 특히 여학생들과 부녀자들의 위문금 모금활동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김병호·장용하·장대진 등 배재 학당 학생 대표들은 1919년2월25일 저녁 정동교회 안에 있는 33인중의 하나인 이필주 목사 방에 모여 3·1운동 참여에 대한 첫 밀회를 가졌다.
우선 3월1일에 뿌릴 전단을 만들기로 했다. 전단 인쇄는 외국인 기관으로 치외법권이 인정된 학당 기숙사의 골방을 사용했다.
사생들이 모두 깊이 잠든 한밤중에 이중화·강우 선생이 문장을 만들고 학생 간부들이 동사를 했다. 전단을 배부하는 일은 사감인 김성호 선생이 맡기로 했다.
이중화 선생은 광화문 비각 옆의 자택에 상해에서 독립당의 연락원으로 건너온 최창식씨를 은닉시켜놓고 각 학교 연락 책임자들에게 임시 정부에서 보내온 잡지『신한 청년』을 배부해 줬다.
장용하 등 배재 학생 대표들은 항일독립을 외치는『목탁』이라는 전단을 만들어 한밤중을 이용, 교외로까지 나가 집집마다 담 너머로 뿌렸다.
마침내 3월1일 정오가 왔다. 배재 학생들은 이날 아침 주동자들로부터「파고다」공원으로 집결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일부 하급생들은 이때까지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파고다」공원에서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한「대한 독립 만세」소리는 삽시간에 서울 장안의 골목골목을 뒤덮었고 일본 기마병들이 노도와 같이 달려들었다.
하오2시 서울역 광장의 인력거 위에서는 애국 투사들의 열렬한 독립연설이 불꽃을 튀겼다.
고종의 국장을 배관하러 왔다가 기차시간을 기다리던 군중들이 분격, 종로를 향해 돌진하다가 급기야 일경과의 정면충돌을 빚어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경의 총 칼에도 아랑곳없이 구리개(현 을지로 입구)와 동대문 쪽에서 밀려온 백의군중이 합세, 절규하는 만세소리는 3월1일 밤까지 계속됐다.
이날 경찰에 연행된 배재 학생은 1백 여명에 달했다. 영문도 잘 모른 채「파고다」공원에 나가 만세를 외치다가 경찰에 붙잡혀 와서야 서로 만난 학생들까지도 악독스런 갖은 고문을 당했다. 연필을 다섯 손가락에 굴곡으로 끼워 꺾어대고 밧줄로 어깨를 맨 후 몽둥이를 끼워 틀어댔다. 어린 학생들은 혀를 늘어뜨린 채 신음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고문을 당하고 풀려 나온 배재 학생 대표들은 3월4일 기숙사에 모여 다음날 상오 9시 남대문 광장에 집합, 다시 시위운동을 개최키로 모의했다. 격려문과 전단은 김병호가 책임을 맡아 인쇄, 배포키로 했다.
5일 상오 8시부터 운집한 서울시내 각 학교 학생들은 남대문∼광교∼보신각으로 간 패와 남대문∼대한문∼보신각「코스」의 학생들이 보신각에서 합세,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외쳤다.
이날 일본 군경에 연행된 학생은 남학생 71명, 여학생 4명이었다. 배재 대표로 잡혀간 김병호 등 18명은 남산 밑 경시 총 감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특히 장대진군은 취조실에 끌려 들어가기만 하면 들것에 뉘어 나오곤 했다. 한국인 곰보형사는 이들 학생들에게 일인 순사보다도 더 악독한 고문을 가했다.
3·1운동 때 활약했던 배재 출신들은 지금도「3·1동창회」(회장 정기섭 박사)모임을 갖고 매년「크리스머스」때 모여 당시를 회상하며 친목을 도모한다. 회원은 장용하·신봉작·이건춘 등 30여명인데 필자도 회원의 한 사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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