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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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요새「프랑스」에서「베스트셀러」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색은「알랑·펠피트」가 쓴『프랑스 병』.
「펠피트」는 역사가이며 일곱 번씩이나 각료를 지낸바 있다. 따라서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부피도 5백「페이지」가 넘는다.
이런 책이 발매 3주만에 재판·3판을 거듭했다 한다. 깊은 감명을 받은「지스카르·데스텡」대통령은 저자를 특별히 초청해 얘기를 듣기까지 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이 책은「프랑스」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펠피트」에 의하면「프랑스」적인 악의 양원은 관료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고도의 관료주의가「프랑스」사람의 자부심을 키워 준 반면에「프랑스」의 쇠퇴를 가져왔다.
「프랑스」의 관료주의는 좋은 의미에서나 나쁜 의미에서나 너무도 완벽했다.
이 때문에 국민은 모든 것을 국가가 대신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만큼 자발성이 줄어들고 결국은 관료주의 중심으로 국가가 경직화되어 갔다는 것이다.
물론「펠피트」는 관료주의에 따르는 관료들의 나쁜 양성과 병폐를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책임불감증이다.
말하자면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시키지도 않은 일은 할 필요는 없다. 이래서 「책임 둘러대기」현상이 생긴다.
가령 민원서류를 들고 관청의 한 창구를 찾았다고 치자. 『그건 여기 소관이 아닙니다』『그럼 어디를 가면 됩니까?』『그건 잘 모르니 안내에 가서 물어보시오』『안내에서도 모른다면서 여기 가보라는데요?』 그러면 그 창구직원은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다시 어디로 가보라고 뱉듯이 대답한다.
이런 책임전가 기풍이 만들어 낸 현상을 이른바 「레드·테이프」라 한다.
결재절차가 복잡해지는 것을 언뜻 보면 책임소재를 밝히는 것 같다.
사실은 책임의 무한분산화를 꾀한 것이다. 결국 책임을 아무도지지 않으려는 것이나 같다. 그러나「레드·테이프」는 한편으로는 관료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관료제도가 완벽해질수록「레드·테이프」는 더욱 심화하기 마련이마.
「막스·웨버」는 관료제를『규칙에 의한 합법적 지배』라고 풀이한 적이 있다. 그는 또 행정의 이상을『노여움도 흥분도 없는 상황』에 두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런 관료제란 너무나도 기계화한 나머지 공복이란 생각마저 잊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게「한국병」으로 되어 있다. 어지간히 큰 수술이 아니면 고쳐지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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