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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교수의 역할이 무엇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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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이만열)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국 문화의 매력 가운데 교수가 누리는 사회적 지위를 꼽을 수 있다. 한국에선 교수가 정부 정책 심의에 큰 역할을 하고, 기업 자문도 하는 등 지식인으로 대접하는 분위기다. 외국인인 나도 ‘박사’라는 직함으로 상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지식인들의 지위는, 지난 50여 년간 훨씬 약화되고 있는 미국과는 크게 다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나 해리 트루먼 같은 미국 대통령들이 많은 교수를 요직에 임명한 것은 옛날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과 같은 나라를 동경해 왔고, 그런 나라에 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교수가 사회적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하려다 보면 상당히 심각한 장벽 앞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교수의 역할은 미묘하고도 다양하다. 우선 교수를 평가하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분야의 교수들이 여러 가지 면을 면밀히 감안하면서 전체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대학에선 까다로운 기준에 따라 기계적으로 교수를 평가하고 있다.

 대학에서 교수를 평가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평가 항목이 있는데 강의와 연구, 그리고 봉사 활동이다.

 강의의 경우 강의를 듣는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친밀감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수의 역할은 학생들의 취업이나 진학을 위한 추천서를 써주거나 성적표를 확인해주는 것으로 변질되고 있다. 교수가 연예인처럼 재미있게 강의하는지도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교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학생들이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에 도전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는 것이다. 한국 교육의 위대한 전통은 스승과 학생의 관계가 부모-자식과 비견할 수 있는 평생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교양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강의 이수에 따라 졸업증을 받을 때까지로 제한돼 있다. 학생들이 암울한 미래에도 생존할 수 있도록 가혹한 진실을 가르치는 데 대한 보상은 인색하다.

 그 다음, 연구 분야가 있다. 나는 작년에 SCI(과학연구인덱스) 또는 SSCI(사회과학인용색인) 저널에 게재하지 않는 논문은 ‘업적’에 입력할 필요가 없다고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 나는 예전에 SSCI 저널에 여러 번 기고를 했지만, 내가 쓴 책들과 다른 저널에 기고한 논문이 훨씬 더 많은 영향(impact)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하지만 상식을 뒤집을 만한 뛰어난 논문보다 SSCI 저널에 그저 그런 평범한 논문 10편을 올리는 학자가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이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그 시대의 SCI에 게재하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교육부의 논문 평가에서는 영어로 작성된 연구만 가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 문학 쪽의 최고 저널은 프랑스어로 쓰여 있고, 러시아 역사 분야의 훌륭한 저널은 러시아어로 작성된다. 심지어 과학 분야에서도 영어는 유일한 언어가 아니다. 비록 많은 과학자가 주로 영어로 논문을 작성하지만, 식물학 분야의 일부 최고 저널은 일본어로 쓰인다. 과학 분야에서 일본어·중국어·한국어 등으로 게재되는 탁월한 논문들이 늘고 있다.

 ‘봉사’ 분야는? 나는 환경과 관련된 다양한 자원봉사를 해 왔다. 하지만 학교는 단지 부서 내에서의 관료적 업무만을 ‘봉사’로 여기고 있다.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일반 대중이 인식하지 못하는 중요한 현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고유의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학문과 윤리를 결합한 고도의 지식인 문화를 갖고 있었던 대한민국에 어울리지 않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은 양심을 지닌 훌륭한 학자들을 배출했던 ‘향교’의 위대한 전통이 있다. 이처럼 독립적이고 헌신적인 학문 기관에서 장기적 시야를 갖고 학문적 수월성과 윤리적 우월성을 추구하며, 이렇게 윤리와 학문이 결합된 지식인 문화가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두 가지를 분리하는 것은 한국 대학의 가장 매력적인 문화전통을 파괴하는 일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학문 분야에서의 지도적 위상과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지 말자.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 (이만열)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