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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의 풍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70년대 초에「키신저」·주은래·「브레즈네프」같은 고전적인「스타」들이 주연하던「데탕트」장막극은 1976년을 고비로 갑자기 암 전했다. 원래 그 동안의「데탕트」나 세력균형 론은 주연배우들의 개인적인 연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연극이었다. 때문에 그들 가운데 2명이 퇴장하자마자 연극은 더 이상 계속하려야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 두 사람의 자리엔「카터」와 화국봉이란 새로운 인물들이 대신 들어앉았다.「카터」는 정치와 외교를「키신저」나「닉슨」모양 권력공학 적으로 취급하려 하기보다는『죄 많은 세상에 사랑을 실천』하는 자세로 해 나가겠다고 천명했다. 그런가 하면 또 화국봉은 오랫동안 금기로 되어 있던 현대화와 중도적 개방정책을 들고나섰다.「카터」의 도덕성이나 화국봉의 중도성은 물론 일시적인「슬로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도덕성과 현대화를 각각 천명한 새로운 주역들의 등장과 더불어 앞으로의 연극이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톤」을 보여 줄 가능성은 많다.「카터」의 논리성은 한마디로『적에 대한 호의와 우방에 대한 무관심』으로 특정 지어지던「키신저」류의 비정한 논리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모스크바」나 북경과 화해하는데 필요하다면, 서구·일본·중 소국·제3세계의 입장쯤은 얼마든지 묵살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이를테면「키신저」의 논리였다.
또 핵이니 전략이니 하는「커다란」문제의 타협을 위해서는 그까짓 인종분쟁이니 식량난, 또는 환경문제니 복지니 하는 따위의「사소한」문제쯤은 일일이 아랑곳할 수 없다는 것이「키신저」식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주역「카터」와 그 외교 진은 그런 묵살되었던 인간본연의 염원과 재난을 더욱 중요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앞으로「카터」「브레진스키」「밴스」「리처드·홀브루크」로 이어지는 미국의 새 외교 「팀」은 적과의 미소나 밀실 흥정보다는 우방과의 일체감회복에 주력할 전망이며, 대국간의 전략문제 못지 않게 인종문제, 핵 확산방지, 무기판매의 축소, 식량원조 등, 다분히 윤리적인 과제에 상당한 정력을 쏟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범인류적「휴머니즘」(planetary humanism)은 단순한 시책상의 변화라 기 보다는 바로 오늘의 미국사회가 겪고 있는 보다 심층적인 변화의 풍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제 미·일 두 나라의 지도층 개편으로 한·미·일 세 나라의 3각 협력관계도 새삼스런 재확인과 재조정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를 위해 박동진 외무부장관은 이미 조속한 시일 안에 한-미 외상회담 개최를 구상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의 안전과 서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일치하는 한, 한·미·일 3각 협력관계 자체는 미국에 어떤 행정부가 들어서든 기본적인 변화가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본관계를 지속하는데 있어서의「키신저·스타일」과「카터·스타일」의 철학적 차이 같은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또 적절히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이와 같은 여건변화와 상대역의 변화에 적응하여 우리의 외교진도 77년의 부산한 한-미 교섭에 출 진하기에 앞서 용의주도한 채비를 차려야만 하겠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교를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도『한민족의 자주성』이라는 설득력 있는 철학을 가지고 세계를 대해야 하겠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국으로서도『조선은 자주지방』이라고 했던 1882년의 최초의 한-미 조약 제1조의 수교정신을 다시 한번 깊이 되새김으로써 전통적인「파트너」로서의 성의를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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