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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부인 쑹메이링, 남편 감금한 장쉐량과 연인 사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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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호 29면

1948년 5월, 국민대표대회에 참석한 여성 대표들과 환담하는 쑹메이링. 국민당의 대륙 철수 직전이었지만 전혀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쉐량은 연금지를 타이완으로 옮긴 후였다. [사진 김명호]

지난 일들은 미궁투성이다. 만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벌어진 일도 며칠만 지나면 뭐가 뭔지 모를 일들이 태반이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71>

2010년 여름,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서 장쉐량(張學良·장학량)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시안사변(西安事變)의 배경이나 ‘장쉐량과 중공의 관계’ 등 진부한 소재는 주목을 끌지 못했다. 장쉐량의 여인들과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의 관계에 관심이 집중됐다.

1936년 12월 12일 밤, 1200년 전 양귀비(楊貴妃)가 온천을 즐기던 시안(西安) 교외 화칭츠(華淸池)에 총성이 울렸다. 정변을 일으킨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은 최고 통치권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인질로 삼았다. 5년 전 동북을 점령한 일본과의 전쟁을 촉구하며 2차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승낙을 받아낸 장쉐량은 장제스를 풀어주고 제 발로 군사법정에 섰다. 반세기 이상을 죄수나 다름없는 연금생활을 했다.

시안사변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인질사건이었다. 중국의 운명과 세계질서에 엄청난 영향을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간략히 소개한다.

장쉐량이 아니었다면 장제스의 중국 통일은 불가능했다. 밀월시기의 장쉐량(오른쪽)과 장제스. 1932년 가을, 난징.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중공의 소멸은 시간문제였다. 항일전쟁도 지연되고, 제2차 세계대전 역시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독일은 중국의 우방국이었다. 독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75미리 대포와 저격용 조준경, 생화학 무기의 생산은 불가능했다. 시안사변으로 항일전쟁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양국의 합작에 금이 갔다. 1940년 일본·이탈리아와 손을 잡은 독일이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의 괴뢰정부를 승인하자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후 연합국에 가입한 중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위대한 중화 민족과 게르만 민족이 친구에서 적으로 변한 것이 유감이다. 시안사변만 발생하지 않았다면 세계지도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시안사변은 장막 속에서 벌어진 한편의 유희였다. 시베이(西北) 군벌 양후청(楊虎城·양호성)과 재벌 쑹즈원(宋子文·송자문), 중공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을 비롯해 국공 양당의 특무대장 다이리(戴笠·대립)와 리커농(李克農·이극농)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명연기를 펼쳤지만 조연에 불과했다.

주역이 장쉐량과 장제스·쑹메이링 부부이다 보니, 수십 년간 온갖 풍문이 나돌았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풀어준 게 아니다. 쑹메이링을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다 보니 장제스는 저절로 풀려났다.”

“쑹메이링은 장쉐량이 남편을 인질로 삼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시안 공항에 내렸을 때 함박웃음 짓는 사진이 남아 있다. 사지에 빠진 남편을 걱정하는 여자의 모습이 아니다. 마중 나온 장쉐량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반가워하기는 장쉐량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연인 사이였다.”

1992년 1월, 54년 만에 자유를 획득한 장쉐량은 일본 여류 작가의 방문을 받았다. 청년 시절 얘기를 하던 중 의외의 말들을 쏟아냈다. “나의 여성편력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열네 살 때 친척 여자애가 나를 유혹했다. 어찌나 재미가 있던지 무릉도원에서 노는 것 같았다.” 스쳐 지나간 여인들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별난 여인들도 많았지만, 그들 덕에 여자가 못되게 굴기 시작하면 남자보다 더 고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 장쉐량이 만난 여인들은 총명하고 좋은 교육을 받은 미인들이었다. 한결같이 상대방을 인정하고 장쉐량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여자 때문에 망신당한 적이 없고, 여인들의 애정과 지혜로 인해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기까지는 민국 4공자 중 으뜸이었던 장쉐량의 인격이나 재능, 용모와 지위도 한몫을 했다.

화교 학자에게도 장쉐량은 십여 명의 여인들에 관한 구술을 남겼다. “한평생 유감은 없다. 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자를 따라다닌 적은 거의 없지만 한두 명만은 예외였다.” 누구라고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홍콩학자 한 사람이 쑹메이링과의 관계를 대놓고 물었다. 장쉐량은 “쑹메이링은 나의 지기(知己)였다. 청년 시절 정기적으로 만났던 여인이 열두 명 정도 있었다”며 말을 돌렸다. 가장 좋아했던 여인이 누구냐며 부인의 이름을 거론하자 머리를 흔들었다. “그 사람은 내게 가장 잘해준 사람이지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아니다. 가장 좋아했던 여인은 지금 뉴욕에 있다.”

중국계 언론들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 전 중국은행 총재 페이주이(貝祖貽·패조이)의 부인 장스윈(蔣士雲·장사운)과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이 뉴욕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분명했다. 2001년 가을, 장쉐량이 10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기와 서신들이 공개되면서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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