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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쓰기도, 벌기도 죄스러워” … 소비자도 시장도 조용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6일 낮 서울 회현동 남대문시장. 가방과 기념품·옷가게 등이 늘어선 대로가 차분하다. 평소 같으면 호객과 흥정 소리로 시끌벅적했을 거리다. 손님이 들어서면 그제야 “네, 오세요”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상인도 적잖았다. “손님도 많이 줄었지만, 일단 말이 없어요. 손님도 말이 없고, 나도 힘이 없고.” 비누꽃을 파는 강병만(53)씨가 말했다. 중년 여성을 상대로 하는 장사는 가장 침체가 심하다. 자녀를 둔 여성들이 이번 사건으로 받은 충격이 그만큼 크다. “나부터도 장사할 마음이 안 나요. 손님들이라고 옷을 사고 싶겠어요. 절반 이상 줄었어요. 나도 옷 사라고 못 하겠어요. 이 마당에 내가 돈 벌겠다고 나서는 것도 죄스럽고….” 여성 의류를 파는 서옥숙(52)씨는 설명을 하다 말고 눈물을 훔쳤다.

#직장인 오영준(43)씨는 직장 동료들과 26일 떠나기로 했던 1박2일 캠핑을 최근 취소했다. 대신 캠핑 멤버들과 안산시 고잔동 올림픽기념체육관에 설치된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기로 했다. “딸을 두 명 키우다 보니 매일 신문과 TV를 보며 웁니다. 캠핑 가서도 우울하기만 할 것 같아 조문이나 가자고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오씨의 중학생 큰딸이 2박3일로 가기로 했던 단체 워크숍, 초등학생 둘째 딸이 가기로 했던 학교 산행도 취소됐다. 그는 “연휴 맞아 가족 여행 간다는 분들도 취소한 경우가 많더라. 여행도 신이 나야 가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의 충격으로 국민이 움츠러들며 내수 시장이 가라앉고 있다. 시간이 지나며 생필품 중심으로 시장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지만, 가정의 달 5월의 특수는 사실상 실종될 거란 게 업계의 관측이다. 일각에선 경기 회복세마저 꺾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관광·여행·여성의류 매출 직격탄
가장 타격이 큰 분야는 관광·여행 산업이다. 24일 각 지자체에 따르면 전국에서 131건의 문화관광축제가 취소됐고 113건의 행사가 연기 또는 축소됐다. 배 여행 침체는 말할 것도 없다. 제주도에 위치한 선박전문 여행중개업체인 ‘배타고닷컴’엔 취소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 정지훈 대리는 “한 직원이 하루 100통 정도의 전화를 받는데 거의 전부가 ‘예약을 취소하겠다’는 전화”라며 “황금연휴로 꼽혔던 5월 초의 배 여행도 절반 이상이 취소됐다”고 말했다. 교육부가 1학기 수학여행을 전면 금지하며 국내 여행사와 전세버스 업체 등이 폐업을 우려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전세버스 업체 홍익관광의 강희화 관리이사는 “사건 직후 여행 취소가 늘며 29대 차량 중 17대 이상이 영업을 하지 못했다”며 “경기도 쪽 수학여행 전문 업체들은 타격이 더 심하다”고 전했다. 인천 청호관광여행사 관계자는 “차들이 죄다 서 있다. 버스 할부금을 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놀이공원도 매출이 크게 꺾였다. 삼성에버랜드 관계자는 “매일 밤 쏘는 불꽃을 취소하고 지난 주말 열기로 했던 벚꽃 축제도 취소했다”며 “사회 분위기가 침체되다 보니 입장객이 최대 30%까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백화점 소비는 양분화됐다. 전반적인 매출이 다소 줄어든 가운데 명품과 여성의류 매출이 특히 크게 줄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우울·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이의 상당수가 여성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롯데백화점에선 이달 16~23일 매출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0.8% 줄었다. 특히 여성의류 매출은 4.2%나 줄어 0.8% 늘어난 남성의류 매출과 대조를 이뤘다. 신세계백화점도 이달 들어 사고 전날까지 전년 대비 15% 정도 늘었던 명품 매출이 사고 이후 1.8% 줄었다. 업계는 침체된 사회 분위기를 감안해 자숙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이번 주말 무역센터점 옥상정원에서 열기로 했던 애완동물 동반 파티와 대구점에서 열기로 했던 연예인 팬 사인회 등을 취소했다.

생필품 소비는 큰 타격을 비켜가는 분위기다. 이마트의 경우 사고 이튿날인 17일만 해도 지난해 같은 요일과 비교해 전국 매출이 10%나 줄었지만 지난 일요일엔 반대로 매출이 4% 늘었다. 김윤섭 이마트 홍보팀장은 “사고 충격에 장도 보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았던 고객들이지만 결국 일상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주요 생필품을 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재난, 자연 재난보다 경제 타격 커
대형 재난으로 소비가 움츠러든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1년 일어난 미국 9·11 테러로 그해 9월 미국 소매판매는 2.4% 줄어 9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1995년 6월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직후인 3분기 민간 소비 증가율이 1.2%에 그쳐 전 분기보다 0.8%포인트 줄었다.

전문가들은 재난으로 인한 경제 타격이 자연 재난과 사회적 재난에서 다르게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자연 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보통 단기적이고, 이후 피해복구자금 투입으로 장기적 성장률은 오히려 상승한다. 사망·실종자 1만8524명을 낸 동일본 대지진이 대표적이다. 사고가 일어난 2011년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4% 떨어졌지만 이듬해엔 1.4%로 반등했다.

하지만 개인의 잘못이나 사회 시스템 등의 문제로 발생한 사회적 재난의 경우 경기 자체를 급랭시킬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안타깝고 우울한 마음에 시민들이 소비를 줄이고, 이는 기업의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오정근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자연재해는 보통 복구 과정에서 정부 지출이 늘어 GDP가 성장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사회적 재해는 피해 수습에 그치기 때문에 타격만 생기는 것”이라며 “4월 민간소비 증가율이 전년 대비 2.6%인데 0.6%포인트만 꺾여도 GDP 성장률이 0.3%포인트 줄어들 정도로 전체 경제가 크게 흔들린다”고 말했다.

더욱이 이번엔 여전히 100명에 가까운 실종자가 남아 있는 데다 선체 인양까진 앞으로도 최소한 두 달 정도는 더 걸릴 것으로 보여 내수 경기에 미칠 영향이 더 커질 전망이다.

다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회 전체가 안전 인프라를 강화하는 데 힘을 쏟으면 관련 분야에서 수요가 늘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오세조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각자가 주변의 안전을 보완하고 점검하는 쪽으로 소비를 늘리게 되면 오히려 안전 관련 내수 시장이 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경기 회복세가 둔화되는 상황에서 경기를 움직이는 ‘심리’가 완전히 꺾이지 않을지가 관건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4월 소비자심리지수는 108로 석 달째 제자리걸음. 1분기 민간소비 증가율은 0.3%로 지난해 3분기(1%) 이후 계속 떨어지고 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회복세가 굳건하지 않은 상황에서 큰 충격이 와 우리 경제에 많은 부담이 될 것”이라면서도 “국내 경기는 세계 경제 흐름에 크게 영향을 받는 만큼 연간으로 받는 충격은 그리 크지 않을 걸로 본다”고 풀이했다.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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