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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세모가 되면 으례 「불우이웃 돕기 구경과 자선의 「무드」가 고조되는 것이 근자 우리 사회의 관례처럼 되었다.
아마도 복잡하고 바쁜 현대 생활 속에서 그 동안 잊어버렸거나 소홀히 했던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세말에 나마 되살려 비록 잠시일 망정 그들과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어 갖고자 하는 선의가 메마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 4촌」이라는 속담이 말해 주듯 우리 사회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웃간에 상부상조하는 안보 정신과 훈훈한 타의적 인간관계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이 같은 전통적인 미풍양속은 점차 퇴색되고 이웃간의 대화마저 단절된 「이웃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도시일수록 이런 경향은 두드러져 모든 집들은 대문을 굳게 닫아걸고 높은 담을 쌓고 철조망을 둘러 이웃에 누가 살고 있으며 누가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울타리 사회」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러하기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강조하고 참된 이웃되기를 설교한 신약성서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감동적인 교훈을 주는 것이다.
강도를 만나 초죽음을 당한 채 길가에 버려진 나그네를 보고서도 거룩한 제사장과 신전 의식을 맡아보는 「레위」들은 못 본체하고 피해간 데 반해 이방인으로 멸시받던 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극진히 구원했다는 설화다.
어느 시대에나 흔히 있는 지도층 인사들의 위선을 꾸짖고 각성을 촉구한 것이요, 빈자 일등의 의미를 설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는 또 『바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여 선행의 현시가 아니라 엄밀성을 강조한 것도 합축이 깊다.
『중생이 병들었을 때 보살이 같이 병들고 중생이 병에서 나았을 때 보살이 병에서 낫는다』고한 「유마경」의 설법에서 보듯이 불교 또한 중생, 즉 이웃에 대한 자비를 으뜸가는 덕목으로 치고 있다.
보살이 수행할 육파 나밀의 첫째로 「포시」를 들고 있을 뿐 아니라, 물질적인 것을 베푸는 「재시」, 깨우침을 주는 「법시」두려움에서 건져 주는 「무외시」의 3시로 나눈 것 자체가 중생을 위해 음덕을 쌓고 공덕을 베푸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기독교의 이웃사랑이나 불교의 포시·선업은 다만 내세를 위한 복음이나 법륜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현세의 인심 안무와 사회 안정을 기하는 안전판의 역할까지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도덕의 실천에 주 안목을 둔 유교 역시 그러하다. 불행한 근린에 대해 「측은지정」을 표시한 맹자의 『효오로이급인로』(내집 내 어버이를 대우하듯, 남의 노인에게 미치라)라는 구식 및 경로의 사회윤리 강조도 이를 분명히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은 언제나, 대 인적 관계 속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며 따라서 이웃과 격리·고립되어선 옳게 살아갈 수가 없다. 불우한 이웃에 등을 돌린 채 자기만의 쾌락을 추구하는 이는 언젠가는 커다란 공허감에 사로잡히게 되기 마련이다. 추위에 떨고 배고픔과 외로움에 울고 있는 가엾은 이웃을 위해 기꺼이 측은의 정과 구원의 손질을 뻗고서야 비로소 마음의 평정을 얻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게 아닌가.
유복한 사람이나 불우한 사람이나 다같이 동시대를 사는 고뇌에 찬 인간 동행이기 때문이다. 세말을 맞아 평소에 소홀했던 가난한 이웃들, 인생의 응달에서 안타까이 애정의 손길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우리의 불쌍한 형제 동포를 따뜻이 안아 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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