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바둑 정치와 체스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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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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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과 체스는 어떻게 다른가. 바둑은 집이 많으면 이긴다. 두는 과정에 돌이 죽기도 하지만 돌을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다. 체스는 상대의 왕을 죽여야 끝이 난다.

 헨리 키신저는 그의 저서 『중국이야기(On China)』를 서양과 중국의 사고방식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바둑과 체스를 비교했다. 체스가 ‘결정적인 전투게임’이라면 바둑은 ‘쉽사리 끝나지 않는 작전게임’이라고 말했다. 체스는 상대를 파괴한다. 하지만 바둑은 자기 세력을 키워나간다. 예외는 있지만 바둑에서 상대방 돌을 잡는 데 열을 올리는 것은 대개 나 같은 하수(下手)들이나 하는 짓이다. 키신저는 여기서 ‘나만 살자’가 아니라 ‘같이 살자’고 하는 상생(相生)의 전통을 읽어냈다. 전투를 벌이는 ‘현재’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는 지혜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 사례를 들었다. 중국군이 인도에 들어가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체스 방식이라면 바로 점령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군은 이전의 통제선으로 물러났다. 심지어 중화기까지 돌려줬다. “중국과 인도는 영원히 적대관계로 지낼 수 없다”는 게 중국의 판단이었다고 한다. 1300년 전 당(唐)이 인도로 군대를 보냈지만 그 이후 수백 년간 종교와 경제 교류를 해왔다는 것이다.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1399년 몽골의 티무르는 델리에 대승을 거뒀다. 그러고도 10만 명이 넘는 포로를 모두 죽여버렸다. 그래서 티무르는 무엇을 얻었는가.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남만의 맹획을 칠종칠금(七縱七擒)했다. 손자나 방통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상책으로 쳤다. 키신저가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런 이야기를 풀어간 건 공존의 철학을 말하려는 것이다. 72년 그가 베이징으로 날아가 미·중 수교 교섭을 벌였던 그 배경 말이다. 중국이 아직 죽(竹)의 장막 속에 있던 시절이다. 중국의 경제력도 형편없었다. 그때 이미 오늘의 국제관계를 그려낸 것이다. 대단한 예지력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라이벌이 될 상대를 봉쇄해 고사(枯死)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생하고 협력할 길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100년을 내다보는 키신저의 통찰력과 큰 틀을 짜는 미국의 전략적 사고가 부럽다. 한반도 주변 정세가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은 파당을 지어 눈앞의 계산에만 급급한 건 아닌가. 남북 관계나 미·중·일 관계는 조금 더 냉정하게 장기적인 안목으로 설계해야 한다.

 외교뿐 아니다. 더 절실한 건 국내 정치다. 정치적 경쟁자란 결국 함께할 파트너다. 우리는 정치를 쉽게 비난한다. 하지만 그런 후보에게 투표한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정치인의 도덕성 탓으로 돌려서는 대책이 없다. 제도적으로 공존의 틀을 만들어 놓아야 하는 이유다.

 다수결은 딜레마다. 최선은 아니지만 끝내 타협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결국 다수결로 간다고 믿는 다수파는 타협을 거부한다. 소수파는 타협 가능성을 포기하고 사사건건 반대하며 몸으로 막게 된다. 이래서야 정치가 설 자리가 없다. 이걸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지만 거꾸로 식물국회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야당이 일일이 막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도 없다. 차라리 좀더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해볼 때다.

 민주적 절차에 승복하지 않는 건 승자 독식 구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1인1구제다. 1등을 못하면 한 표가 차이 나건 한 표도 못 얻건 다를 바가 없다. 대통령의 권한은 절대적이다. 예산을 짜는 권한도, 주요 공직들에 대한 임면권도 모두 사실상 대통령에게 있다. 그러니 정당들은 대통령 선거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다수결을 존중하는 대신 그 결정에 대해 언제든 국민에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항상 집권할 기회가 열려 있다면 야당도 사사건건 반대하지는 못한다. 자기 발목을 잡게 되기 때문이다. 중·대선거구제, 정당명부제로 복수정당체제를 지향하는 것도 극한 대결을 줄이는 방법이다.

 2008년 김형오 국회의장 시절 자문기구는 이원집정부제 헌법을 제1안으로 제안했다. 국회 개헌자문위원회가 다음 달 말 내놓을 안도 비슷한 내용이라고 한다. 당장 개헌이 이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더라도 논의는 이어가야 한다. 킹의 생사에 모든 걸 거는 체스 정치가 아니라 각자 자기세력을 넓히며 경쟁하는 바둑 정치가 되어야 한다. 반 집 차이라도 승패는 깨끗이 인정하고, 다음 대국을 준비하는 정치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김진국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