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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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스스로 묻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회의에 빠진 사람은 흔히 있다.
대단찮은 것 같지만, 양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삶의 보람을, 곧 삶의 존엄을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는 삶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발상에서 나온다.
가난을 참다못해 또는 불행을 견디다 못해, 사람들은 곧잘 『삶이 이렇게 괴로울 바에야 차라리…』하고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멋진 삶을 못 누렸을 바에야 죽음만이라도 멋지게…하고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삶의 존엄이 없는 곳에 죽음의 존엄이 있을 까닭이 없다. 아무리 「멋지게」죽는다고 삶 그 자체가 가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한 사형수가 『죽을 권리』를 끈질기게 주장하고 있다. 그것도 총살로 멋지게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사형 집행의 방식 중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프랑스」 혁명 때의「길러틴」이다.
지난 72년에 오랜만에 「프랑스」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을 때도 이 「길러틴」의 유물이 다시 등장했었다.
지금 「프랑스」에는 「길러틴」이 꼭 3개 「파리」에 남아있다. 따라서 지방에서 사형을 집행할 때에는 집행인과 「길러틴」이 「파리」에서 지방까지 운반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개스」나 전기로 사형이 집행된다. 이것은 사형수에게 가장 고통을 적게 주는 방식이다. 따라서 「길러틴」만큼 잔인하지도 않다. 그러나 지극히 기계적으로 죽음이 처리된다. 그만큼 몰 인간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아무리 법을 내세운다 해도 잔혹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의 존엄과는 어떤 이유로써도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기왕에 죽이기로 결정된 바에야 더 이상의 정신적 고통을 주지 않도록 빨리 집행해 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왕이면 총살이라는 「멋진」방식으로 죽여 달라는 것도 그럴싸한 말로 들리기는 한다.
그러나 『죽을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는 이상으로 사람들에게는 『살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남의 『살 권리』를 마음대로 앗아간 장본인이 『죽을 권리』를 내세운다는 것은 어딘가 웃기는 일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냥 웃어넘길 수만도 없다. 아무라 사형수라 하더라도 그 역시 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의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마저 앗아갈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다.
미국 대법원은 일단 그의 사형 집행을 보류시켰다. 문제는 좀처럼 풀릴 것 같지가 않다. 여기에는 윤리니, 자비니, 또는 인간성이니 하는 법 이전의 요소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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