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동독 안방에 파고든 자유의 사자|서독 TV 전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서독 TV에서 상품 광고를 본 동독인이 서독에 있는 누이에게 그 TV 광고에 나온 물건을 사 보내 달라고 편지를 썼다. 서독의 누이는 그 편지를 받고 자기도 처음 알게된 상품이라 어리둥절 한다. 많은 서독 사람들이 한 두번씩은 똑같이 경험하는 일이다.
사람이야 마음대로 넘나들지 못하는 국경은 있지만 전파 매체만은 이 국경에 구애받지 않는다. 광고까지 동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판에 다른 TV「프로그램」의 경우야 말할 것도 없다.
동독 사람들이 서독 TV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비단 세계 곳곳의 뉴스 뿐 아니라 국가 선전으로 일관된 동독TV에 나오지 않는 동독내의 사건들도 포함된다.
얼마 전 동독의 「마그데부르크」시에서 「브스비츠」 목사가 총구 탄압에 항의하여 분신 자살했다. 동독 당국은 이 목사의 사인을 정신병으로 단정 지어 버렸다. 그러나 동독의 교회와 사망자의 측근은 동독 공산당이 청소년들의 생활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또 교회에 간섭하는데 대한 항의로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사건은 동독 신문과 라디오 「텔리비젼」에 정신병으로 죽은 것이라고 간단히 보도되었지만 동「베를린」에 나가 있는 서독 「텔리비젼」의 특파원들은 매일 이 사건의 진상을 상세히 보도했다. 동독사람들이 모두 이 보도를 시청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방송의 경우 「라디오」는 동독 전체가 서독 방송의 시청지역이며 TV도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 전국의 90%가량이 서독 TV의 가 시청 지역이다. 서독 TV에 대한 시청율도 동독 주민 전체의 75%에 이르러 동독 TV를 능가하고 있다.
이처럼 서독의 전파 공세에 동독은 거의 무방비상태라 할 정도로 속수무책이다.
동독에는 약6백만 대의 「텔리비젼」이 있는데 이는 서독의 3문의 1에 해당한다. 한 때는 간접적인 시청 억제 방법으로 서독 TV 시청자를 「안테나」의 방향을 보고 조사하는 등의 수법까지 사용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공연히 악평을 듣느니보다는 방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음인지 『볼테면 봐라』는 식으로 억지 생색을 내고 말았다.
72년 기본 조약 체결과 때를 같이하여 72년11월8일 양간에 협정을 맺은 기자 교환 결정에 의해 72년 말부터 서독의 기자들이 동 「베를린」에, 또 동독 기자들이 「본」에 상주하면서 보도 활동을 했다.
당시 서독의 수상 「빌리·브란트」와 동독의 국가 평의 회의장 「빌리·슈트프」가「에르무르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무런 강요나 지시 없이 공산당 간부들이 서독의「라디오」와 TV를 보기 시작했던 것이 차차 번져나가 일반 국민들도 서독 TV를 즐겨 보게됐고 그래서 서독 TV를 보는게 동독인들의 즐거움이 되었다.
양독 기자 교환 협정 후 지금 동「베를린」에는 서독의 16개 신문·방송에서 보낸 특파원이 활동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취재 활동이 「본」에 나와 있는 동독 기자들이 누리는 만큼 자유스럽지는 못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도 이들이 취재 보도 는 동독내의 사정은 동독에 새로운 자유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 동독에서는 동독 형법과 「헬싱키」선언을 내세워 정식으로 서독이주를 신청한 사람들이 20만명이 되는데 동독 공산당 간부들은 두려움 없이 공공연하게 서독으로 가겠다고 나오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에 부딪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거기다가 공산주의자들을 자부하는 지식인 중심의 저항 운동이 고개를 들어 침묵하는 다수 국민의 공명을 받자 당 간부들이 안절부절 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최근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동독의 저항 음악가이며 작가인 「볼프·비르만」에게 공민권의 박탈을 조처한 동독 수뇌부의 신경 과민적 처사라 할 수 있다.
「비르만」은 동독 사이의 부조리를 자기의 풍자시에 담은 비판 음악을 겁내지 않고 동독인에게 들려주어 당에서 축출 당했고 이미 1965년부터 공식장 출연이 금지되어 행동을 극히 제한 받아왔다. 그는 지금까지 완전히 봉쇄된 동독 안에서 「로버트·하베만」 교수와 함께 동독 당국을 비판해 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책과 음악은 동독에서는 판매 조치가 내려져 모두 서독과 서「유럽」에만 출판되고 있다.
그의 음악은 나오는대로 손으로 베껴지든지 혹은 녹음 「테이프」에 복사되어서 동독으로 전파되고 있다.
지난 12일 밤 서독의 「쾰른」 체육관에서 6천명 관중 앞에서 가진 첫 공연에서 「비르만」은 13년만에 4시간에 걸쳐 동서독의 사회상을 「기타」에 담아 풍자 음악으로 들려주었다.
문제가 된 것은 이 「비르만」의 공연이 서독 「텔리비젼」의 중계로 동독의 시청자들에게 모두 중계된 것이다.
이 때문에 동독 당국은 그의 재 입국을 거부한 것이다.
동독 당국의 「비르만」 공민권 박탈 조치 후 동독에서 이 공연을 본 저명 작가 12명이 다른 40명의 유명 예술인들과 함께 「비르만」 구출 운동에 나서고 바야흐로 전 동독에서 「비르만」 구출 운동을 펴가고 있다. 동독 당국은 이 구출 운동의 주동자 중 작가 2명과 서명 운동을 벌인 대학생 5명을 또 구속했다.
동독 정부가 「비르만」에 내린 이번 조처는 현재 경제난과 서독 이주 신청으로 일고 있는 사회 분란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당 간부들이 예방책으로 단행한 조처라고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두고 벌써 『「동베를린」의 봄』을 예언하는 사람도 나오고 또 혹자는 최소한 이 사건의 여파가 경우에 따라서는 과거의 냉전시대로 돌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본다. 한가지 적어도 지금까지의 동서독 관계에 커다란 부담을 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