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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환영인파 180만 명, 풍선 5만 개, 꽃종이 30가마 '극진 대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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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미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방한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60년 6월 김포공항에 도착해 연설하고 있다. [중앙포토]
74년 11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태운 차량 행렬이 시청 쪽으로 진입하자 시민들이 고층 빌딩에서 오색종이를 뿌리며 환영하고 있다. [중앙포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25~26일 방한은 정부가 치열한 외교전 끝에 얻어낸 성과다. 외교부는 “일본만 방문하면 그들의 역사 도발에 청신호를 켜주는 셈”이라고 집요하게 설득해 당초 순방 일정에 없던 우리나라를 끼워 넣었다.

 하지만 아무리 축하할 일이라고 해도 오바마가 방한하는 날 집집마다 성조기를 게양하라고 한다면? 오바마가 묵게 됐다며 호텔이 투숙객들의 예약을 강제 취소한다면? 백악관이 갑자기 오바마의 방한 일정 취소를 일방적으로 발표한다면?

 지금으로선 어느 하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과거 미국 대통령들의 방한 과정에서 이런 일들이 실제로 있었다. 한국을 찾은 미국 정상들을 위한 의전(儀典)의 변화상을 살펴보면 ‘의전이 곧 나라의 품격’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한국을 찾은 최초의 미국 대통령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다. 6·25전쟁 종언을 공약으로 내세워 대선에서 승리한 그는 1952년 12월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최전선을 둘러봤다.

 60년 6월 미국 현직 대통령 자격으로 다시 왔다. 정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그를 환영했다. 허정 국무총리 부부를 비롯해 김도연 국회부의장, 배정현 대법관 등 입법·사법·행정 3부 대표가 김포공항에 가서 그를 맞았다.

포드 방한을 기념해 만든 담배와 우표. [중앙포토]

 서울시청에는 아이젠하워의 대형 초상화가 걸렸다. 방한 축하 기념 우표와 담배도 만들어졌다. 주택가에선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게양하도록 했다.

 이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찾을 때마다 과거 중국의 칙사를 맞이하는 것과 흡사한 풍경이 벌어졌다.

 74년 방문한 제럴드 포드(1913~2006) 대통령을 위해 정부가 동원한 가두 환영 인파는 180만 명이었다. 초등학생들까지 나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었다.

 풍선 5만여 개가 띄워졌고, 고층 빌딩에서는 30가마 분량의 오색 꽃종이를 뿌렸다. 포드가 머문 조선호텔 18층 고급 스위트룸은 한 달 전부터 다른 손님을 받지 않고 내부치장 공사를 했다. 1000만원 넘게 들여 비단 벽지와 커튼 등으로 재단장했다.

79년 지미카터 대통령이 오픈카를 타고 시청 앞을 지나며 환영 인파를 향해 손 흔드는 모습(사진 위). 83년 김포공항에 도착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부부를 전두환 대통령 부부가 직접 안내하고 있다(사진 아래). [중앙포토]

 지미 카터(1924~) 대통령이 온 79년 정부는 처음으로 ‘동원식 환영’을 하지 않겠다고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거리는 여전히 환영하는 시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카터는 훗날 “해외에서 이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고 회고했다.

 80년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태생적 한계는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최근 공개된 83년 외교문서를 보면 전두환 정권이 로널드 레이건(1911~2004)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설정한 예상 의제 가운데 가장 크게 우려한 것이 미국이 우리나라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는 시나리오였다.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감형 및 석방 조치를 미국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분석한 주미 한국대사관의 상세한 동향 보고도 있었다.

 전두환 정부는 레이건이 한국에 오는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에 들어갔다. 주미 한국대사관에 레이건의 모교 교가와 애창곡 악보를 구해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건 방한 사전준비를 위해 온 미국 측 선발대는 ‘고자세’로 일관했다. 환영식 사열엔 “군대식 느낌이 난다”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국회에서의 기념 식수와 환영식 참석, 내빈과의 악수 등도 “레이건 대통령이 피곤하다”며 취소 내지는 축소를 요청했다.

 미국을 향한 ‘저자세 의전’은 87년 6월 민주화 항쟁, 88 서울올림픽 이후로 조금씩 변화 조짐을 보였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93년 청와대 녹지원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조깅하는 모습. [중앙포토]

 노태우 정권 시절인 89년. 조지 HW 부시(1924~) 대통령이 방한해 국회 연설을 했을 때의 일화다. 양국 의전팀은 부시가 본회의장에 입장하기 40분 전에 여야 의원들이 모두 착석해 15분 동안의 연설이 끝날 때까지 본회의장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의원들이 “자존심을 저버린 처사”라고 항의했고, 결국 10분 전까지 입장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하지만 한국을 배려하지 않는 미국의 외교적 결례는 최근까지도 계속됐다. 부시 전 대통령 부자가 대표적이다. 아버지 부시는 91년 12월 초 한국에 올 예정이었다. 양국이 일정에 합의하고 공동발표를 하기로 했는데, 불과 몇 시간 전 갑자기 백악관이 청와대에 방한 일정 연기를 통보했다. 이에 청와대는 기자단에 미리 배포한 언론 발표문을 다시 수거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아들 조지 W 부시(1946~) 대통령은 2008년 아버지와 닮은꼴의 결례를 범했다. 7월 방한하기로 해놓고 6월 25일 한국엔 사전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미국 언론에 방한 계획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일주일 뒤인 8월에 한국에 가기로 다시 결정했다는 소식 역시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2008년 8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어깨동무하며 우의를 과시하고 있다. [중앙포토]

 대신 부시는 방한했을 때 이명박 대통령과 공동기자회견을 한 뒤 어깨동무를 하고, 이 대통령의 차량에 동승하는 파격적 행보로 우리나라의 면을 세워줬다.

 미국 대통령은 해외 출장 때 전용 방탄 차량 ‘캐딜락 원’을 공수해 온다. 캐딜락 원이 아닌 다른 차량에 타는 것은 관례상 매우 드문 일로, 부시는 이렇게 한국에 대한 굳은 믿음을 표현했다.

 실제로 의전 절차가 간소해진 것은 김영삼 정권 들어서였다. 빌 클린턴(1946~) 대통령이 93년 처음 방한할 때 국빈방문이 아닌 공식실무방문으로 하자고 먼저 제의한 것도 한국이었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에 가기 전 미국 대통령이 먼저 한국을 찾은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한·미 관계의 성숙도와 문민정부 출범에 대한 존중의 뜻을 보여주려는 미국의 의지였다. 클린턴은 김 대통령이 단식 투쟁한 기간까지 알고 왔을 정도로 사전에 준비를 많이 했다고 한다.

2009년 11월 19일 취임 후 처음으로 방한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국군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대신 한국도 ‘마음을 사는 의전’을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상징적인 행사가 양국 정상의 조깅이었다. 김 대통령과 클린턴은 7월 11일 이른 아침 청와대 녹지원의 265m 트랙을 열한 바퀴 함께 돌았다. 이를 위해 영부인 손명순 여사 지휘로 주변에 보름 전부터 27종의 야생화를 심었고, 통역을 맡은 비서관은 꽃 이름을 전부 영어로 외웠다.

 20년 넘게 조깅으로 체력을 다져온 김 대통령과 47세였던 클린턴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통역 비서관은 두 달 가까이 맹훈련을 해 무사히 조깅 통역을 마칠 수 있었다. 당시 통역을 했던 주인공이 박진 전 한나라당 의원이다.

위쪽부터 미국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보잉 747개조), 전용 헬기인 마린 원(VH-60N), 전용 차량인 캐딜락 원(캐딜락 DTS 방탄 리무진).

 클린턴의 두 번째 방한은 96년 북한에 경고 메시지를 주자는 취지에서 급하게 주선됐다. 당시 클린턴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했다. 대규모 방한단이 머물 숙소로 급하게 제주 호텔신라가 선정됐다. 이 통에 호텔 측이 경호와 의전을 이유로 이미 투숙을 예약한 신혼부부 90쌍에게 강제 취소를 통보해 항의가 빗발쳤다.

 2009년 오바마의 첫 방한 때는 정상회담 의전 컨셉트를 ‘하트 투 하트(Heart to Heart)’로 잡았다. 오바마가 상원의원 시절 태권도를 배운 점을 감안해 이명박 대통령은 도복을 선물했다. 환영연에서는 불고기와 숯불구이 바비큐를 나란히 냈다. 불고기는 한우, 바비큐 고기는 미국산을 썼다.

 외교부 의전장을 지낸 백영선 전 주인도 대사는 “유신정권, 군사정권을 지나 문민정부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위상도 올라갔고, 미국과 동등한 1대1 관계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게 의전에 그대로 반영돼왔다”고 설명했다.

의전팀의 적, 돌발상황

의전의 가장 큰 적은 돌발상황이다. ‘디테일’은 의전의 전부다. 정상들의 보폭이나 걷는 속도까지 감안해 분 단위로 계획을 짠다. 그러나 돌발상황이 벌어지면 통제가 불가능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1993년 방한했을 때 만찬에서 생긴 일이다. 양국 의전팀은 시간 절약상 만찬사와 답사의 통역은 생략하기로 했다. 그런데 답사를 하던 클린턴이 갑자기 통역을 불렀다. 통역은 엉거주춤 두 정상 사이에 섰다. 클린턴도 어색했는지 원고에 있는 내용의 10%도 읽지 않고 답사를 끝내 버렸다. 한국 의전팀은 미국 쪽에 왜 이 사실을 클린턴에게 알리지 않았느냐고 강하게 항의했다.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는 궁중취타대 연주 등 환영식을 감상하느라 느릿느릿 이동한 부시 때문에 한국 의전팀이 애를 태웠다. 한국 대통령이 외국 정상을 맞기 위해 청와대 현관에 나와 있는 시간은 20~30초를 넘겨선 안 된다. 부시가 늦게 오는 통에 김대중 대통령 부부는 현관에서 2~3분을 서 있어야 했다.

 부시의 핵심 측근인 캐런 휴스 백악관 특보가 환영 리셉션 중 결혼반지의 다이아몬드를 잃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 청와대 경호팀이 행사 뒷정리 중 카펫 틈에 끼어 있던 다이아를 발견해 출국 직전 무사히 전달했지만 의전팀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유지혜·정원엽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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